나를 기다리는 음악을 알지 못한 채,
익숙함이 만든 감상의 경계
“그야 8번이 훨씬 더 좋은 작품이니까 그렇겠지.”
장대한 제7번 교향곡에 이어 발표된 제8번 교향곡이 7번과 달리 청중에게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는 소식을 제자 체르니가 전하자, 베토벤은 간단히 응수했다. 이 한마디에는 베토벤 특유의 자조 섞인 자부심이 배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더 크고, 더 진지하며, 더 강렬한 것을 위대하다고 여기지만, 그는 오히려 짧고 경쾌하면서도 실험적인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진정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유명한 작곡가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동등하게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조차 600여 곡이 넘는 작품 가운데 일부만 반복적으로 연주된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은 소나타 장르에서는 단 3곡을 남겼는데, 여기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세 곡 중 제1번(Op. 4)은 좀처럼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18세에 쓴 이 작품은 고전적 형식 안에 자신의 서정적 본능을 길들이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곡은 감정의 흐름이 형식 속에 억눌려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결국 형성기의 흥미로운 실험작으로 남았다. 쇼팽의 이름이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상징이 되었음에도, 그의 첫 소나타는 그 상징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관심 밖에 머물렀다.
‘낭만주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슈만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언젠가 슈만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한 연주회에서 슈만이 20대 초반에 쓴 <인터메초 Op. 4>를 택한 적이 있다. 당시 연주를 기획하던 연륜 있는 작곡가 선생님은 “이 작품은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여러 단편을 이어 붙인 습작에 가깝다”고 평했지만, 막상 연주가 끝나자 “들어보니 곡이 생각보다 훨씬 좋네”라고 말씀하셨다. 감상의 가능성 밖에 있던 작품이 청취의 자리로 돌아와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익숙함의 기준 바깥에서 음악이 새롭게 들리는 경험 - 그것이야말로 낯선 레퍼토리가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감동일 것이다.
음악사 중심에 놓인 작곡가들조차 선택과 망각의 질서 속에서 존재한다. 어떤 작품은 정전의 중심에 남고, 어떤 작품은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그 경계야말로 새로운 감상의 문이 열리는 자리다.
정전의 질서, 매니악의 자유
음악회장에서 청중이 기대하는 것은 흔히 좋은 음악이다. 하지만 이 ‘좋음’이라는 말은 언제부터인가 익숙함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곡을 들을 때 안도감을 느끼고, 그 익숙함 속에서 감동을 찾는다. 그렇게 감상의 폭은 조금씩 좁아지고, 음악의 세계는 점차 일정한 틀 안에 머물게 된다. 정전(canon)은 본래 규범과 척도를 뜻하는 말로, 음악사에서는 한 시대가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합의한 작품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의 체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교육과 제도, 비평과 시장의 판단이 맞물리며 형성된다. 음악사의 중심을 이루는 정전은 특정 작곡가와 일부 대표작만을 중심에 올려둔다. 이로써 정전은 청중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곧 ‘좋은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며, 그 바깥에 놓인 수많은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침묵시킨다.
그렇다면 익숙함의 틀을 넘어 예술을 새롭게 마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대안은 매니악적 감상 방식에 있다. 매니악(maniac)은 흔히 편벽된 취향이나 과도한 집착으로 오해되지만, 예술에서의 매니악은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잊힌 것과 낯선 것을 향해 귀 기울이려는 감상의 의지다. 정전이 공인된 아름다움을 보존한다면, 매니악은 미지의 아름다움을 탐색한다. 다시 말해, 매니악은 익숙한 기준에 안주하지 않고, 음악이 지닌 잠재적 생명력과 표현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매니악은 단순히 비주류적 취향이나 집착이 아니다. 낯선 작품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 좋은 음악인가를 다시 사유하게 된다.
흔들리는 중심 — 정전과 매니악의 역동적 관계
앞서 살펴보았듯, 정전은 완결된 체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감각과 청중의 취향, 비평의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임시적으로 그어진 경계일 뿐이며, 절대적이지 않다. 한 시대에 중심을 차지하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변방으로 밀려나고, 한때 주변에 머물던 것이 새로운 시선 속에서 재조명되어 중심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즉, 정전과 매니악은 시대와 감상의 변화 속에서 그 의미와 위치가 새롭게 재편되는 역동적 관계를 형성한다. 음악사는 중심과 주변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만들어 온 유기적이고 생동하는 서사다.
20세기에 낭만적 가곡을 쓴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 작곡가 아돌프 쿠르트 뵘(Adolph Kurt Böhm, 1926–2020)은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나치 집권기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강제수용소의 비극을 목도한 그는, 시대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하면서도 서정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아돌프(Adoph)가 아돌프(Adolf) 히틀러와 발음이 같다는 점조차 유감으로 여겼다. 뵘은 파괴와 폭력의 시대 속에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예술가였다. 『음악과 인간애』(2014)의 저자이자 화가, 피아니스트, 가곡 반주자이기도 했던 그는 예술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유를 증언했다. 뵘에게 낭만적 서정은 도피가 아니라 저항의 언어였다. 헤르만 헤세의 시를 비롯한 독일 서정시에 곡을 붙인 그의 500여 곡의 가곡은 혼돈의 20세기 속에서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드러낸다. 그는 시대의 미학적 요구에 역행함으로써 자신이 믿는 예술의 본질을 지켜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낭만시대 슈베르트와 슈만의 가곡을 즐겨 감상하며 그 정서에 공감하지만, 정작 현대 작곡가가 같은 언어로 작품을 쓴다면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긴다. 감상에서는 낭만을 선호하지만, 창작에서는 이를 구시대로 규정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대착오적 창작’은 비판받지만 ‘시대착오적 감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과거의 언어를 들으며 감동받는 자신을 시대착오적으로 보지 않는다. 연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과거 음악을 그 시대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시도, 즉 시대 연주 혹은 역사적 연주가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예들은 예술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얼마나 편의적이고 선택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예술의 수용과 창작 사이에 놓인 이 미묘한 불균형에서 정전과 매니악의 경계가 흔들린다.
뵘의 예술적 태도와 음악은 우리가 무엇을 ‘시대적’이라 부르고 또 무엇을 ‘유효하다’고 믿는지를 조용히 되묻는다. 그의 음악은 시대를 거슬러 잊혀가는 낭만적 감수성을 오늘의 감상 속에 되살린다. 현재 뵘의 작품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극히 일부 청중에게만 연주되고 감상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아직 초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그의 음악이 현재 정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며, 새로운 감상의 가능성과 정전과 매니악의 역동적 경계를 다시 주목하게 한다.
반대로,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 경계를 흔든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한때 대중적이며 진부하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모더니즘과 전위적 흐름이 주류였던 당시 많은 비평가들은 낭만성 짙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구시대적이라 폄하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진솔하고 직접적인 감정의 힘으로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음악이라고 평가된다. 한때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음악이, 그의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통해 오늘날 정통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는 ‘정전과 주변’, 혹은 ‘정전과 매니악’이라는 이분법이 시간과 맥락에 따라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성과 대중성, 중심과 주변의 구분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뒤집히며, 정전의 질서 또한 그 변화를 통해 재정립된다.
결국 정전과 매니악은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매니악은 정전의 틀을 흔들고, 정전은 그 흔들림 속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예술의 생동감은 이 두 질서가 맞닿고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 피어난다.
아직 모르는 음악 — 예술이 말을 거는 순간
헤르만 헤세는 「음악」이라는 에세이에서, 음악회를 기다리며 느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오늘 나를 기다리는 음악을 알지 못한 채, 추측과 탐색의 예감으로, 어떨까 하는 바람과 설렘으로, 아주 근사하리라는 확신으로 가득한 상태다.”
이 짧은 문장은 예술 감상의 본질을 정확히 짚는다. 아직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마음은 열린 상태 — 그때 예술이 우리에게 새롭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그 ‘모르는’ 상태 속에서 색다른 감상의 가능성을 만난다. 음악은 이해에 앞서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의 예술적 감각은 다시 깨어난다. 익숙한 선율과 안정된 구조 대신, 생소한 리듬과 낯선 화성은 우리의 귀와 마음을 새롭게 자극한다. 매니악적 감상 태도는 단순히 희귀한 레퍼토리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음악을 새롭게 경험하고자 하는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미 알고 있는 아름다움을 반복하기보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탐구다.
감상의 안전지대인 정전의 바깥에서 우리는 예술의 생기와 온기를 다시 마주한다. 아돌프 쿠르트 뵘이 그랬듯, 시대의 요구에 역행하면서도 인간적 서정을 포기하지 않은 예술은 차가운 시대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처럼 한때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가려졌던 작품이 메마른 이 시대에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음악이 무감의 시대를 깨우는 생기임을 깨닫는다. 음악의 가치와 의미는 특정 시대나 양식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정전 너머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좋음’의 기준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매니악적 청취는 그 낯섦을 견디며 감각을 새롭게 조율하는 과정이다. 기존 지도 밖 미개척지는 여전히 광활하다. 경계를 넘는 감상은 ‘모른다’는 상태 속에서 시작된다. 정전의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 그 틈에서 음악은 새롭게 숨 쉰다. 우리는 그렇게 익숙함을 넘어 낯설고 매혹적인 음악의 세계로 나아간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화음웹진 2025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