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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Jan 29. 2023

‘변하다’는 말의 재정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죽을 듯이 아팠던 사랑도 잊히기 마련이다. 이번 사랑은 잊기 힘들겠거니 생각하며 이별을 맞이했다. 이별 후에 밀려 올 거대한 상실감을 감당할 각오로 그를 만나러 갔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손 한 번 잡지 않은 채로 등을 돌렸던 그날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그날 밤에 전화를 걸어 ‘고맙다’ 고 말했다. 무엇이 고맙냐고 물으니, 그저 당신의 존재가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있어서, 그리고 그와 내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한동안 아파서 끙끙 앓았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눈물도 마른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밤이 오는 게 무서웠고, 아침은 절망적이었다. 공허함, 허무함,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모든 단어들이 그가 나간 자리에 들어섰다. 죽고 못 살 것처럼 부둥켜안아도 흔한 안부인사조차 할 수 없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리는 게 연애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나를 처절하게 만들었다. 제발 내 안에서 죽어달라며 떠나간 그에게 애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곱슬머리, 반달 웃음, 내 이름을 불러 주던 허스키한 목소리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찰 때마다 '죽어, 죽어' 외쳤다.

 

 속에서 몰아치던 바람이 먹구름만 남긴 채로 잠잠해질 무렵,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 전 사람과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달랐다. 새로운 사람은 내 안에 웅크려있던 전 사람을 서서히 밀어냈다. 비로소 그가 그립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밀려난 자리에는 상흔이 아물지 않고 남아 있었고, 그 상흔은 자꾸만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항상 몇 발자국 밖에서 그를 지켜봤다. 너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니? 들리지 않는 질문을 반복했다.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그는 두 걸음 성큼 다가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쉽게 마음 주지 마, 얼마나 더 아프려고? 내가 나를 수없이 다그쳤다. 하지만 사람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세상에 모든 이별 시와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이제 피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를 잡아보기도, 손바닥 하나를 마주대어 보기도 하면서 서서히 그를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를 얘기하는 내 얼굴을 본 동료가 ‘꽃이 피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나 하며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렇게 그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올 때쯤, 돌연 그가 떠났다. 내가 알던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 차분히 이별을 고했다. 이제 나는 이별 앞에서 차분해질 담력이 생겼다. 나를 망가뜨리는 관계를 거절할  있는 단호함도 길러졌다. 이런 나의 모습이 성숙함이라면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이별을 고하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다. 한때는 나도 사랑이 변한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변한다’는 것은 태생이 부정적인 어휘가 아니다. ‘변하다’라는 말은 좋은 쪽, 나쁜 쪽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이 커진 것도 변한 것이고, 나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작아진 것도 변한 것이다. 세상 만물은 변하기 나름이고, 세상 만물에 속한 우리들도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내 안에 성큼 들어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버리고 떠난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짧든 길든, 나에게 보여 주었던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테니. 나를 향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 준 그들에게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상처받고 상처에 몸부림치면서도 우린 또다시 기억을 잃고 사랑을 한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감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든다고 하지만, 없어지진 않는다. 비관적인 사람도 사랑 앞에선 어디선가 내 인연이 있을 거라고 무의식 중에 믿고 있다. 아플 걸 알면서도 이 짓을 또 했다며, 나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사랑은 어리석은가?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아마 난 계속 어리석겠지.



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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