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에서 내려오니 소르사 할머니가 있었다
부르고스 대성당 앞. 막상 도착하니 하루쯤 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기껏 다시 함께하게 된 일행들과 또 이별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 얻은 하루를 부르고스 산성에 올라 보내기로 했다.
도시 안에서 보는 것과는 또다른 삼차원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 깊은 우물 요새를 간직한 부르고스 산성은 역사와 풍경을 동시에 선물하는 종합선물세트였다.
산성을 내려오니 나를 기다리는 또다른 선물이 있었다. 바로 소르사 할머니였다.
[7.31 목요일 / 걸은지 14일째]
이미 부르고스를 다녀왔지만, 이제는 어제의 관광객이 아닌 다시 순례자로서 부르고스 입성을 할 시간.
호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버스로도 한참 걸렸던 부르고스. 오늘은 그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버스로 지나치던 거리와 걸으며 바라보는 거리는 확연히 다르다. 길가의 풀 한포기 조차도 순례자에게 인사를 하는 듯하다. "부엔 까미노, Buen Camino!"
어제는 보지 못했던 거리의 노란색 화살표와 가리비 모양 표지판들도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도시는 활기에 차 있었고,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하늘과 바람의 빛깔만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짙푸른 색을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다.
노랗고 빨간 원색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보이면서부터 부르고스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길 위의 건물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멀리 부르고스 대성당의 웅장한 첨탑도 가끔씩 건물들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윽고 도착한 구도심. 다시금 순례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대성당 부근에 다다르자 아는 얼굴들도 나타나 준다. 중간 중간 아름답고 오래된 성당을 지나가게 되는데 하나같이 너무 아름답고 멋져서 감탄사가 나오겠지만 잠시 아껴두어도 좋겠다. 곧 나타날 엄청난 광경을 위해서.
산타마리아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부르고스의 이 까테드랄은 레온 대성당과 함께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의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건축물이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라면을 파는 현지인의 식당 돈 누뇨(Don Nuño)가 있다. 까미노의 친구 연합이라는 커뮤니티에서 한국인 순례자들을 위한 라면메뉴를 권유하여 끓이는 방법까지 전수했다고 한다. 불어터진 라면이 나왔지만 역시 스페인의 한가운데에서 스페인 요리사가 끓여준 라면을 먹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 함께 제공되는 공기밥은 소금간이 되어 짜고 끈기도 없는 스페인 쌀밥이었는데 절대로 말아먹지 말았어야 했다. 참고로 라면과 공기밥은 세트메뉴이지만 물은 따로 돈을 내고 사먹어야 한다.
이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함께 중국요리와 라면을 먹은 한국인 친구들과 헤어지기로 했다. 하루 더 머물기로 한 것이다. 대성당의 미사에도 참석하고 싶었고 이 곳의 공립알베르게에서 하루쯤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골목 헤매기도 해야 했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선 나는 성당 북쪽 골목을 따라 부르고스 산성을 올라보기로 했다. 골목 끝 산성 오름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박물관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산 에스테반 성당이 있었다. 잠시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산길을 올랐다.
산길을 구비칠 때마다 뒤로 내려다보이는 부르고스 도심의 풍경. 그리고 드디어 나타나는 대성당의 위용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민망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전망대에서 거의 한시간 동안 부르고스 대성당과 도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입장한 부르고스 산성. 아직도 발굴이 진행중인 듯한 산성에는 엄청난 비밀의 우물 요새도 숨어 있다.
부르고스 산성에서 보낸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더구나 산성을 구경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글쎄 소르사 할머니 부부가 또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두분은 전 날 묵은 마을에서 오늘 아침 택시로 배낭을 부치고 가볍게 부르고스까지 걸어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짐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길을 모르겠다며 도움을 청하셨고 기꺼이 두 분을 모시고 호텔(꽤 멀리 떨어진)을 찾아내어 할머니의 배낭까지 옮겨 드렸다.
그리고 노부부로부터 저녁 대접을 융숭하게 받았다. 할머니는 꼭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주문을 잘 못 하시는 바람에 결국 다른 요리들로 만족해야만 했다.
성당 광장과 골목들을 누비며 만난 예술가들과 아름다운 바르, 쇼핑몰들은 덤이었다.
부르고스에서 하루를 더 보낸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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