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많은 백수', 많은 직장인들의 로망일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돈이 많지만 직장인은 아닌'일 것이다. 연봉을 엄청 많이 받는 직장인도 있지만 그들은 그들을 로망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 이쯤에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직장'이 문제가 아닐까? 그건 뭐 각자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기본 소득이 근로소득이었던 직장인이 백수가 되면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을 한다. 즉, 그놈의 '돈'이 문제이다. 그럼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는 '돈'의 문제가 없느냐? 그건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수에게 '돈'의 문제는 직장인의 '돈'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리필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다시 언제 리필이 될지 기약을 할 수 없기에.
누구나 백수가 될 것을 대비해서 돈을 모아 두진 않는다. '노후'라는 백수의 시간을 위해서 준비를 하긴 하지만 그건 30-40대 직장인들에겐 조금은 먼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당장 지금 혹은 가까운 미래에 무언가를 위해서 돈을 준비하긴 하지만 그 무언가가 '백수'는 아니다. 그에 비해 나는 안타깝게도 지난 10년 동안 정기적으로 백수가 되었기에, 그리고 처음 백수가 되었던 몇 번 동안 돈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나서부턴 언제 또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프게도 그때를 대비한 재정적 준비를 항상 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난 정기적으로 돈이 나가야 하는 적금 같은 재테크는 할 생각도 없었지만 할 수도 없었다.
혹시 백수가 돈 쓸 일이 뭐가 그렇게 많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근데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다. 직장인에서 백수로 신분이 변하긴 했지만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 이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나가야 하는 돈은 그대로이다. 예를 들면 월세를 살고 있다면 월세, 대출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이자 혹은 원리금, 그리고 그냥 정기적으로 나가는 생활비 등등. 그리고 백수가 되면 추가적으로 드는 비용이 발생한다. 그건 바로 평일 식비이다. 대기업을 다니건 중소기업 혹은 스타트업을 다니건 식비가 전체 혹은 일부 지원되는 회사들이 최근엔 많다.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곳들도 여전히 있지만.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료인 커피 역시 대부분 회사 탕비실 혹은 사무실에 비치가 되어 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평일에 차비를 제외한 한 푼도 안 쓸 수 있다. 하지만 백수를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냉장고를 파 먹는다고 해도.
나는 어쩌면 돈과 관련해서 백수에 최적화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긴 하다. 난 기본적으로 미니멀리스트이다. 물건을 살 때 항상 1:1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산다. 예를 들면 운동화 하나를 버리고 다시 하나를 사는 그런 방식. 추가적으로 무언가를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기본 아이템 같은 경우엔 조금 비싼 가격을 주고 사서 오래 사용하는 편이다. 내가 아직도 즐겨 입는 네이비 블레이져 같은 경우는 10여 년 전에 70만 원 정도를 주고 산 제품이다. 트렌드가 조금 변해서 핏이 조금은 올드해 보이긴 하지만 그런 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즐겨 입는다. 또한 난 물건을 거의 잃어버리지 않는다.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 역시 단골 분실물 베스트 3이 핸드폰, 지갑, 우산 일 것이다. 난 이 3가지 물품을 단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지갑도 10년 전에 선물 받을 것을 계속 쓰고 있고 우산 역시 10여 년 전에 산 우산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전 우산 역시 갑작스러운 폭우에 우산이 주저앉아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사면 소모품이 아닌 이상 10년 정도는 사용하는 것 같다. 그나마 내가 가장 자주 구매하는 물품은 속옷과 양말 정도, 그리고 제조사의 농간으로 인해 3년 정도마다 핸드폰을 새로 구매하는.
그런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더불어 안타깝게도 정기적인 백수 생활로 인해 소위 말하는 '좀팽이'가 된 것 같다. 2021년 초에 더 이상 전원 케이블이 없으면 켜지지 조차 않는 랩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무게의 나의 랩탑을 바꾸기 위해 처음으로 당시 새로 나온 맥북에어-지금 이 글을 작성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를 구매했다. 구매할 당시에도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며칠간을 고민 고민하다가 구매를 하게 되었다. 이 맥북에어가 내가 지난 10년 동안 나를 위해서 처음으로 구매한 100만 원이 넘는 제품이었다.
작년 말 유행처럼 기사화되던 '파이어족'이 어쩌면 '돈 많은 백수'와 비슷한 맥락 일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본인들의 소득 중 극히 일부만을 소비하고 모두 투자를 해서 돈을 모은다. 목표 금액은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앞으로의 기대 수명까지 살 때 필요한 금액이다. 예를 들어 40살에 은퇴해서 90살 까지 산다는 전제하에 30억 등 이런 식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런 '파이어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저 유행이어서 기자들이 편하게 기사화한 것 일 수도 있고. 과거의 웰빙 열풍이 그랬고 욜로가 그랬듯이. 하지만 웰빙도 욜로도 그랬던 것처럼 '파이어족'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파이어족이 될 가능성뿐만 아니라 파이어족이 되기 위한 과정 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