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수일지

기다림과 자존감

by 그런남자

백수생활의 감정을 표현하자면 ‘기다림의 연속 속에 지켜야 하는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서 본 글도 아닌 내가 직접 백수 생활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명제이다. 어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든 나처럼 그냥 다시 취직을 준비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백수는 하루하루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근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영화 상영을 기다리며,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약간은 지연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특정 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과는 정말 다르다. 백수의 기다림은 제한 시간이 없다. 아니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불특정 시간이라는 차이가 있다.


회사에 지원을 하고 전형 과정을 모두 거치고 job offer를 받는데 어떤 방해도 없이 그리고 대단히 일 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전제하에 최소 2주는 걸린다. 내가 경험해 본 것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 그게 가능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능하다. 내가 지원하는 그리고 재직했던 회사들은 최근엔 대부분 스타트업이었고 난 거의 대표 혹은 경영진 + 대표하고 인터뷰를 진행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즉, 바로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길게는 1개월까지도 걸린다. 지원자들은 하나의 회사만 지원하고, 기다리고 그 회사의 전형이 마무리되면 다른 회사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지원해 봄직한 곳들을 지원하고 기다린다. 낚시로 치면 낚싯대로 하는 것이 아닌 투망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기다림은 거절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회사에서 보내는 sorry mail에 적혀 있듯이 '귀하의 자질은 우수하나 제한된 인원을 블라블라~' 처음 이 메일을 받게 되면 '뭐야? 왜 내 자질은 우수한데 안 뽑아?'라는 반말심이 들긴 하지만 그냥 무덤덤해져 버린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저 말이 딱히 거짓도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도 저런 형식적인 메시지라도 복붙 해서 보내주는 곳들은 나은 편이다. 최근엔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그냥 '답 없음'으로 결과를 통보하는 20세기에나 존재했던 21세기에는 사라져야 할 시대착오적인 짓을 하는 곳에 많다. 이렇게 계속된 거절을 당하게 되면 아무리 멘탈이 강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건 자존감이 대단히 높은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난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자존심이 세진 않다. 자존감과 자존심을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데 엄연히 다르다. 내가 구분하는 방법은 '감'과 '심'의 차이이다. 쉽게 말하면 힘의 방향이 나를 향하는지, 남을 향하는지의 차이인데 이건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되면 다른 글에서 심층적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암튼, 좀 재수 없게 들릴 수 있지만 난 자존감이 낮을 이유가 거의 없다. 잔병 치례 하지 않는 면역력과 현대인의 난치병인 비염, 알러지, 아토피 등-최근엔 아토피 비슷한 게 생기긴 했지만-도 없는 비교적 건강한 신체에 외모도 존잘은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대학을 나왔고 남들이 다 아는 회사도 다녔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난 별로야, 난 구제 불능이야' 등의 부정적인 말을 달고 사는 것도 내 상황을 아는 사람들에겐 민폐일 것이다. 이런 나 역시 4년 전인가? 백수 생활을 겪으면서 우울증 초기가 왔던 적이 있었다. 정신의학과를 갈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이긴 했지만 내 나름의 방법으로 잘 극복을 했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그 당시에 내가 느낀 감정 중 가장 큰 부분은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닐까?'였다. 난 종교는 없는 유신론자이다. 특히, 사람 개개인은 무언가 역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나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고 일을 하면서 그 역할들을 충분히 잘 해내 왔다. 난 자타공인 '일잘러'이기도 했기에. 근데 그 시점에 내 머릿속에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난 내가 생각하는 거만큼 잘 될 수 없는 걸까?' 등등 나를 부정하는 말들이었다. 심지어 '내가 거쳐온 모든 망한 스타트업들이 나 때문에 망할 걸까?'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치 파괴왕 처럼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라고 여기는 건 난 40여 년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점, 그게 설사 그냥 '짜증나'처럼 아무 의미 없는 푸념으로라도.


그때 이후 난 다시금 '근데 뭐 어쩌라고'의 마인드로 잘 살아가고 있다. 그 이후로 백수생활이 또 있긴 했었지만 그때 역시 '뭐 어쩌라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