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하루
'백수가 더 바쁘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음... 난 이 말엔 동의할 수가 없긴 하다. 기본적으로 난 백수가 아닐 때도 '바쁘다'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도 하기에 더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하는 일이 많긴 하다. 사람들은 하는 일이 많으면 바쁜 게 아니냐고 반문하곤 할 때마다 '바쁘다'는 감정적인 문제이고 '할 일이 많다'는 물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약간 차이가 있다고 말을 한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말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겐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수들은 그렇지 않은-대표적으로 직장인들-에 비해 하는 일이 많긴 하다. 직장인은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라는 공간에서 보내기 때문에 그런 것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백수들은 그렇게 해야 할 '집안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회사에 있으면 그렇게 외면하고 싶어지는 해야 할 일들이 집에만 있으면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는지. 여기서 다시 한번 살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경외를 보낸다.
다른 백수들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백수일 때의 하루는 크게 다르지가 않다. 다른 백수와 비교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난 회사를 다닐 때도 대단히 루틴 하게 생활을 하는 편이다. 언제부터, 왜 그렇게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 짐작해 보건대 약간의 '허세'에서 시작을 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규칙적으로 사는 남자의 허세. 간단하게 직장인일 때의 나의 평일의 하루는 대략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리얼, 토스트를 직접 만들어서 혹은 전날 사 온 빵으로 아침을 먹는다. 난 스타트업에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슈트를 입고 다닌다. 뭘 입을지에 대한 고민을 안 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몸의 fit 함을 항상 체크하기 위해서. 출근은 업무 시작 적어도 30분 전에는 한다. 그리고 모닝 루틴인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 퇴근 후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운동을 하러 간다. 운동 후 집에 오면 21시 정도 되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백수의 나의 삶도 크게 다르진 않다. 난 기본적으로 늦잠을 잘 못 잔다. 주말이건 휴일이건 백수일 때건 9시 전에는 일어나는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배가 고파서이다. 난 평일엔 저녁을 먹지는 않는 편이라서. 그렇게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 집인 경우도 있고 집 앞 커피집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11:30 정도부터 오전에 올라온 채용공고를 확인한다. 그리곤 내 기준에 부합하는 곳이 있으면 지원을 한다. 점심을 먹고는 대부분은 어딘가로 나가는 편이다. 기본 성향이 집돌이는 아니기도 하고 평일에 누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주말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갈 수 없는 곳들을 가는 것, 신상 커피집, 힙한 식당들, 그리고 전시회들이 그런 곳들이다.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는 편이다. 직장인일 때는 평일 휴가 혹은 주말에 하던 것들을 백수 때는 맘만 먹으면 매일도 할 수 있다. 이는 다음에 적을 '백수의 혜택'에서 좀 더 자세히 적도록 하겠다. 그리곤 직장인일 때 운동 가던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운동을 하러 간다. 그건 내가 운동을 하는 곳이 그 시간부터 주로 운영을 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다시금 채용 사이트에서 오후에 올라온 공고들을 확인하고 지원을 하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항상 백수로 살 때 아쉬운 건 백수가 시작될 때 무언가를 해 보고자 하는데 항상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난 평균적으로 3개월 정도 백수를 지속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 기간 동안 외국어를 공부할 수도 있고 새로 나온 솔루션이나 tool을 익힐 수도 있고 혹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수도 있다. 가장 최근에 백수일 때는 그동안 쓰고 있던 소설을 가열차게 써봐야지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냥 채용 공고만 들락날락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그나마 다행인 책을 읽으면서 주로 하루를 보낸다.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허송세월 하면서. 그렇다고 난 의지가 약한 인간은 아니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건 대부분 다 하면서 살아왔다. 근데 항상 백수기간이 시작할 때 생각한 일들만 유독 이루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도 있는데 마음에 와닫는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난 멀티가 잘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인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정도. 그리고 짐작컨데 무언가 하나가 정해 져야 다른 걸 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이 생기는 건 아닐지라고 생각하는 정도.
직장인일때 보통의 하루가 아닌 특별한 하루가 저녁에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백수일 때 특별한 하루는 아마도 인터뷰를 하러 가는 경우일 것이다. 백수일 때 그때만 슈트를 입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