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수일지

something good

by 그런남자

백수가 좋은 점이 있을까? 솔직히 백수가 되고 처음 며칠 혹은 몇 주는 좋을 수 있다. 매일 아침 아니 새벽같이 눈을 뜨지 않아도 되고 온갖 업무 관련 스트레스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리액션해 주지 않아도 되고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단, 혼자 산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1년 이상 재직을 했다면 퇴사 후 약 2주 안에 퇴직금이 입금되게 되어 있으니 왠지 계좌도 꽉 찬 느낌이다. 설령 조만간 빠른 속도로 줄어들지라도. 따지고 보면 그냥 마냥 좋을 때는 짧게는 2주 정도 길게는 한 달 정도인 거 같다. 사람마다 조금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그렇게 시간이 점점 지나면 지날수록 기분 좋음은 점점 떨어진다. 마치 자동차의 감가상각이 떨어지는 속도로와 비슷하게. 백수가 별로 좋지는 않을 수 있지만 백수생활은 몇몇 좋은 점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 몇몇 좋은 점들이 크게 다가오기도 하고 본인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내가 그런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 주제의 글을 적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난 회사에 재직 시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꼬박꼬박 휴가를 썼었다. 쓴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뭐라고 한다고 해도 굳이 신경 쓸 인간도 아니기에. 휴가를 쓰게 되면 평상시보다는 조금 늦게 일어나지만 휴가임을 고려해도 빨리 일어나는 편이다. 그리곤 관심 가지고 있던 전시에 오픈런을 하는 편이다. 이미 예매나 예약은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모자 눌러쓰고 출동만 하면 된다. 그리곤 최근 힙하다는 곳들 중 내 취향과 맞는 곳에 가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물론, 치과 같은 병원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은행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중간중간에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백수생활을 하게 되면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 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웨이팅'과 '오픈런'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난 오픈런은 종종 하지만 웨이팅은 거의 하질 않는다. 어딘가 밥을 먹으러 갔는데 웨이팅이 심하면 그냥 그 근처 다른 곳으로 간다. 꼭 그걸 오늘 먹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꼭 그걸 먹어봐야겠다면 그전에 예약을 했을 것이다. 대부분 웨이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럴 경우를 대비한 다른 옵션이 거의 없는 경우이다. 다른 곳을 찾기도 귀찮고 다른 곳을 가기엔 또 그곳이 괜찮을지, 맛있을지에 대한 리스크를 지기 싫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웨이팅을 선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굳이 폰을 들고 검색을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대부분의 남들이 아는 곳들과 남들이 모르는 곳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전에 만나던 여자 친구들은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항상 '머리를 굴려 빨리'라고 나에게 말하곤 했다. '폰을 들어 어서 찾아'라는 말 대신.

그리고 난 전시 및 공연 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나름 평일에 한가로이 즐길 수가 있다. 요즘엔 힙한-전시에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전시는 주말에 최소한 몇 시간은 웨이팅을 해야만 한다. 코로나 때문에 인원을 제한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냥 사람들이 엄청 많다. 본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꾸며야 하기 때문에. 나 역시 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꾸며야 하기 때문에.


위에 것들이 '나에게 좋은 점들'이라면 나의 인생에 영향을 준 좋은 점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기'이다. 위에 나열한 것들은 본인의 선호에 따라서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탐구하는 건 꼭 해 봤으면 좋겠다. 백수일 때건 아닐 때건. 하지만 백수일 때 좀 더 하기가 좋다. 그건 아래 이유에서 이다.


내가 이걸 처음 시작한 건 학부를 마칠 때 했던 첫 번째 백수 때이다. 그때는 '신입 공채'라는 제도가 많았고 대부분의 신입사원을 공채를 통해서 뽑았다 그 공채를 지원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소설'이라 불리는 자기소개서이다. 난 그걸 수도 없이 많이 썼으며 자소설은 나의 글쓰기 습관과 글쓰기 실력의 반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반은 학창 시절과 군대에서 썼던 수도 없는 반성문이다. 자소설의 항목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질문들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왜 우리가 널 뽑아야 하나요?'와 '네가 어떤 사람인데?'이다. 이 중 난 두 번째 질문에 수도 없이 많은 답을 하면서 나에 대해 탐구를 많이 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장점 단점은 뭐가 있는지, 나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인지, 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인지 등등. 그냥 기계적으로 작성할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 긍정적인 충격을 주었던 하나의 인터뷰를 계기로 그 후부터는 이 질문들에 대단히 공을 들여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백수 기간 때는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그리고 그 인터뷰를 마치고 스스로 인터뷰를 복기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처럼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이 된다. 이용할지 말지만 스스로가 정하면 된다.


어찌 보면 내가 한 회사를 10여 년 넘게 계속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나은 점은 이거 하나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얻은 단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탐구. 내가 40대에 가장 가지고 싶었던 능력치인데 그걸 얻는데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긴 했다. 그래서 언젠가 꼭 나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외는 딱히 백수 혹은 백수생활에서 좋은 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좋은 점을 찾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백수가 나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좋지 않은 것'은 맞는 것 같다. bad와 not good은 엄현히 다르다. 그 이야기를 다음번에 적어보고자 하며 '나의 백수일지'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