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토드
※ 이 글은 해당 뮤지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낯선 잔혹사
뮤지컬은 죽음을 소비하길 좋아한다.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이야기하려 애쓰는 이 장르에서 죽음은 없으면 섭섭한 단골손님 중 하나다.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던 주인공은 절정의 순간 죽을 위험에 빠지기 일쑤고 희대의 예술가나 천재들의 굴곡진 삶은 가련한 죽음으로 끝을 맺곤 한다. 죽음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어서, <엘리자벳>에서는 황후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남자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비극을 예견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와 성격으로 변모한 죽음의 개입은 인물들의 삶과 극 전체를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들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죽음의 본질적인 특성들, 예컨대 비극과 어둠, 공포를 그대로 가져와 무대에 펼쳐놓는 방식도 많다. 죽음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나열하는 건 공포감과 긴장을 조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관객인 우리는 어둡고 음침한 무대 위에 나약하게 서 있는 인물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대리 경험하고 이 가상의 경험에 압도되곤 한다.
죽음을 이용한 극이라면 <스위니 토드>도 당당하게 이름을 내밀 만하다. 그런데 어째 이 뮤지컬이 죽음을 이용한 모양새는 다소 낯설고 불편하다. 낯섦과 불편함의 근원은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이기보다 내용상의 윤리적인 문제에 가깝다. 무자비한 살인, 양심의 가책 하나 없는 살인, 그러한 살인으로 탄생한 '인육 파이', 심지어 인육 파이를 희화화하는 노랫말들까지. 아내를 빼앗기고 딸까지 강탈당한 데에 대한 분노는 일말의 도덕과 양심도 사라진 사이코패스(스위니 토드)를 낳고 그 사이코패스는 일상적으로 살인을 행하기 시작한다. 이발사인 스위니가 리듬을 타며 면도칼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뿜은 시체들이 지하실의 주방을 채운다. 이발소 밖에선 인육 파이가 불티나게 팔리고 맛있는 안주에 신이난 손님들이 음악에 맞춰 맥주잔을 경쾌하게 내려친다. 살인, 죽음, 그에 기반한 맛있는 파이의 탄생. 피가 튀기고 시체들이 낭자하건만 이 모든 게 놀이, 놀이, 놀이다. 소름 끼치는 건 어느새 관객들이 그것을 함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위니의 뻔뻔한 미소와 러빗 부인의 능글맞은 대사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린다. 스위니가 면도칼을 들이대는 각도를 '감상'하고,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인형 같다 생각한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슬프진 않다. 지금 이 순간 살인은 놀이이고 죽음은 일상이니까.
<스위니 토드>는 한 남자의 잔혹한 복수극이다. 복수의 이유는 납득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스위니는 부도덕한 사회가 낳은 피해자이지만 그렇다고 무자비한 살인마가 된 그를 동정하는 데까진 차마 우리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 어중간한 지점에서 관객이 스위니를 바라보는 태도는 갈 길을 잃기 십상이다. 윤리가 죽은 도시, 그 도시가 낳은 괴물 같은 살인자. 모든 비극의 원인을 그들이 살아가는 배경(사회)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경을 바탕으로 일어난 온갖 잔혹행위들은 그저 소모적인 소비 대상이 되어버린다. 주인공 스위니는 잘난 영웅도, 가련한 비운의 남자도 아니다. 애틋한 공감도 어려우니 관객의 마음이 오갈 데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무대 위 난무하는 비윤리적 행위들, 이를 야기한 사회 그리고 그 속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잔혹한 사건들에 마주하는 일이다. 피 튀기는 한바탕의 놀이에 휩쓸려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뒤늦게 허한 감정이 밀려든다. 이 이발사의 삶에서 나는 무엇을 읽었나. 멋들어진 교훈은 없다. 허울과 비윤리의 사회를 풍자하는 대사와 노래들은 맛깔나는 양념을 톡톡 뿌리는 역할에 머문다. 살인 파티를 벌인 이발사의 이야기가 그럴듯했는가? 그럼 됐다. 이 작품은 칼에 묻은 피를 무심히 닦아내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낯선 뮤지컬
그래서인지 이 오락성이 조금 낯설다. "너도 한 번 즐겨봐!" 하는 것 같긴 한데 누구에게나 호소할 만큼 대중적이진 않다. 유쾌하지 않아도 장면 장면은 흥미롭다. 뮤지컬을 별생각 없이 즐기는 장르로 본다면 그에 충실한 셈인데 사랑과 죽음을 그려나가는 공식에서는 살짝 빗겨 있어 뻔한 작품은 아니다. 이 오묘한 느낌은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라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 작품을 명확하게 가치 평가하기 어려웠던 것이 본인의 탓만은 아님에 안도했다. "이건 뭐지?" "이건 왜 이렇게 흘러가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그것이 정말 이 작품의 하자인지 혹은 이전에 보아왔던 보통의 작품들과 그저 다르기 때문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막의 마지막곡이 포화처럼 쏟아지는 고음과 웅장한 무대 효과로 점철되지 않는다던가, 주요 인물의 감정을 상세하게 전달하는 노래가 없다던가. 이때쯤엔 이런 게 나와줘야 하는데 하는 기대를 성실하게 깨버린다. <스위니 토드> 전반에 풍기는 어떤 낯섦의 근원이다.
뮤지컬 배우들의 성량과 고음을 자랑하는 넘버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이 작품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 기준에 비추면 <스위니 토드>의 넘버들은 반쪽짜리다. <오페라의 유령>의 'Think of Me'처럼, <캣츠>의 'Memory'처럼, <레미제라블>의 'I dreamed a dream'처럼 공연장을 벗어나 따로 떼놓고 들어서도 안 된다. 손드하임의 음악은 극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뮤지컬 넘버들이 꼿꼿한 자세로 "자, 이제 노래 시작한다", "내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이야!" 하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는 반면 그의 음악은 마치 흘러가는 극 안에 스리슬쩍 발을 담그고 인물들의 손짓, 발짓, 호흡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다.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거나 나 훌륭한 노래지? 하고 으스대는 법이 없이, 그 순간의 장면에 밀착한 채 능수능란하게 멜로디를 탄다. 러빗 부인의 범상치 않은 첫 등장의 'The Worst Pies in London', 스위니가 무자비한 살인자로 변모하는 순간의 'Epiphany', 사람을 인육 파이의 재료를 희화화하는 'A Little Priest'는 그 대표적인 넘버들이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처럼 단일한 곡만으로도 대중적이고 아름답기보다, 손드하임은 독창적인 선율로 장면마다 생명과 개성을 불어넣기를 선택했다. 그래서일까. '음악' 자체에 빠져들었다기보다 '음악이 결부된 장면'에 손쉽게 몰입하는 경험을 했다. 이 낯선 음악에 은근히 매료돼버린 느낌이 싫지 않다.
또 하나의 낯섦은 무대의 이미지다. 3단 기본 구조물의 세트는 텅 비어 있다. 지배적인 색상은 하얀색. 하얀색이라니? 1막의 시작과 함께 무대를 가리던 커튼이 사라지며 새하얀 무대가 드러났을 때의 이질감이란! 물론 여기에는 조니뎁 주연의 영화 <스위니 토드>의 영향이 컸다. 영화는 그렇게 음침하고 울적하고 칙칙할 수가 없지만, 사실 죽음이 난무하는 복수극의 분위기가 어두워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위니가 이 하얗고 텅 빈 무대에서 복수를 벌여야 하는지에 대해 끝내 설득당하지 못했다. 문제는 단지 간소화된 무대나 특정한 색상 때문이 아니다. 미니멀리즘이든 예상을 깨는 하얀 무대이든, 아무리 곱씹어봐도 반드시 '그것이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길이 없다. 채움 대신 비움의 노선을 택했다면 인물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이용한다던가 혹은 공허함을 극대화한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잔혹사와 하얀 배경의 만남 또한 아이러니의 묘미로 승부수를 둘 수도 있었다. 소름 돋을 만큼 새하얀 바탕 위를 물든 새빨간 피에 시선이 압도되었다면 어땠을까. 공연이 끝나고 나가는데 하얀 무대 위에 쏟아져 있는 피 한동이가 눈에 들어왔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그림이었다.
익숙해지기
관객으로서 나는 낯섦과 새로움을 즐기는 편이다. 일반적인 뮤지컬에서 생소한 접근들을 매력으로 느끼고, 혹은 없던 매력이라도 만들어내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습관이 오랜만에 꽤 괜찮은 상대를 만났다. 물론 최소한의 만족이 충족됐기에 더 알아보고 싶고 느낀 바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둔다. 다만 이 작품은 본래 중소극장 규모에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거대한 성량이 필요하지 않은 음악, 최소한의 소품만으로 족한 무대,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담당하는 극이니 말이다. 작은 공간에서 무대와 가깝게 자리하고 앉아 스위니와 러빗 부인의 연기를 밀도 있게 감상하는 상상을 해본다. 터핀 판사의 목에 면도칼을 갖다 대는 스위니의 악랄한 표정도, 정적 속에 그가 부는 휘파람 소리도, 그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도 몸서리 처질만큼 짜릿할 지도. 뭐, 적어도 조승우를 세우겠다는 일념이라면 중소극장은 언감생심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