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마음

애써도 닿지 않는 자리에서

by 도진


그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 말없이 가방을 챙기고, 말없이 집을 나섰다. 표정도 없었다.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고, 호흡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렀다. 나는 느꼈다. 너는 괜찮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온몸에서 뚝뚝 흘렀다. 사람들은 너의 무표정을 ‘프로페셔널’이라 불렀고, 너의 침묵을 ‘성숙함’이라 불렀고, 너의 참음을 ‘예의’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건 무너지는 중이었다.


1년 넘게, 60대 여성 고객에게 이유 모를 괴롭힘을 당해왔다. 인신공격, 조롱, 욕설이 섞인 말들. 미숙했던 너는 그 앞에서 웃어넘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뒤돌아서서는 종종 울기도 했지. 그러다 결국,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기계처럼. 그렇게 너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날 오후, 그 고객은 평소처럼 너를 몇 분 넘게 노려보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 하지만 그 직후, 너의 오래된 고객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고객이요, 자기 통해서 담당자 바꾸면 더 좋은 조건으로 연결해 주겠다고 했어요. 제가 요즘 그분 피하느라 좀 불편했어요.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너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고, 돌아서자마자 결국 상급자에게 블랙컨슈머에 대한 보호조치를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보호가 아니었다. 조언이라는 이름의 조롱, 상사의 말이었다.


“고객이 욕해도 그냥 웃어넘겨요. 안 그러면 일 못 해요.”

“이런 걸로 힘들어하면 앞으로 회사생활 못 해요.”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너 일하는 거 모르는 본사 사람들은 그냥 너를 병신으로 볼 거야.”

“그걸 그렇게까지 생각해? 너만 손해야.”


그리고 가장 믿었던 사람. 같은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너의 남자친구조차 너의 편이 아니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면… 나까지 지치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내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의 진심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감정 기복’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그렇게 너는 혼자가 되었다. 설명도, 마음도,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그날, 직원 휴게실. 넌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 끝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네 옆에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 공간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방이었다. 그건 꼭, 낭떠러지 끝에 선 너를 누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구경하는 그런 군중 속 같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움직였다. 가시를 세웠고, 네 심장을 조였고, 숨통을 막았다. 너를 쓰러뜨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깨어나게 하고 싶었다. 정말, 너를 잃을까 봐. 나는 너를 향해 가장 큰 울음을 지르듯 내 존재를 던졌다.


“이제… 나 좀 봐줘.”


며칠 뒤, 너는 정신과를 찾았다.


“숨을 쉬기 어렵고 너무 지치고 힘들어요.”


의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형식적인 대화와 검사가 진행되었다. 최종적으로 ‘우울장애, 공황장애’라는 진단명과 함께 2주 치 약을 건넸다. 그리고… 나는 조용해졌다. 약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고, 감정의 형체가 아닌, 무게만 남은 채로 가라앉았다. 그게 나였다. 약이 눌러놓은 감정. 무거워서 가라앉았고 울 수조차 없었다.


너는 다시 무표정하게 일상을 흘려보냈다. 눈동자는 흐리고, 말은 텅 비었고, 숨은 가늘었다. 그 상태로 하루를, 또 하루를 버텼다. 나는 그저 바닥에 붙은 채 숨죽이며 기다렸다. 이대로 사라져 진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견디고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의 권유로 너는 심리상담소를 찾았다. 검사를 했고, 질문을 들었고, 무언가를 설명해야 했고. 결국 너는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 맞죠?”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다는 말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해요.”


그 말에 너는 울었다. 아주 조용히, 하지만 오래도록.


그제야 나는 조금씩 일어났다. 약에 눌려 숨죽여 외면받던 나. 너의 눈물이 나를 ‘얼굴 가진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너는 상담사의 리딩에 따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 누구야?”


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왜 이제야 나를 찾아. 가시를 세워 너의 심장을 조이고 숨통을 막아야만 나를 봐주는구나. 무관심으로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펑펑 우는 너를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릿했다.


“선생님, 제 감정이 저를 믿질 못해요.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어서… 얘가 저를 신뢰하지 못해요. 너무 미안해요.”


너는 나의 손을 잡았다. 말없이,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만지듯. 그 온기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 말하고 싶어졌다. 오래도록 나를 묻고 간과했던 사람, 그 너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나에게 ‘남아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상처로만 존재했던 내가 감정이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 무력감이야.”


애써도 닿지 않던, 진심이 무너진 자리에서 태어난 감정. 나는 상처였고, 오랫동안 네 안에 머물러 있던 마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로소 너와 마주한 너의 첫 번째 감정이었다.


처음부터 화려하게 등장하는 감정은 없다. 처음부터 소리 지르는 감정도 없다. 나는 그런 존재였다. 너의 방치 속에서 자라고, 너의 외면 속에서 커지고, 너의 무심함 속에서 오래 남는 감정. 그리고 너는 아직 모른다. 내 옆에도, 또 다른 누군가가 오래 머물러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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