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

무력감은 그렇게 태어났다

by 도진


“무력감이란 친구한테 물어봐줄래요? “


상담사가 조용히 말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질문은 깊고 단단했다.


“왜 심장을 조이고, 숨통을 조여야만 했었느냐고요.”


너는 나를 바라봤다. 어딘지 무서운 듯한 눈빛. 하지만 그 안엔,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야 너는 너 스스로 지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또 웃었겠지. 진심을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했겠지. 그리고 돌아서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소리 죽여 울었을 거야. 나는 그게 싫었어. 그래서, 너를 흔들었고, 너를 조였고, 너의 심장을 두드렸어. 제발, 너 자신이라도 네 편이 되어달라고.


“그럼… 무력감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상담사의 물음에 너는 나지막이, 그러나 또렷이 오래된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는 서울 대학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양가의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인생을 그 가게에 쏟아부었다. 너는 겨우 여섯 살. 오빠는 일곱. 부모님은 평일엔 볼 수 없었고, 너와 오빠를 맡기기 위해 친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수원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집은 박씨네. 아주 오래된, 가부장적이고 남아선호가 뿌리 깊은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늘 오빠만을 챙겼다. 식사시간이 되면 접시 위의 고기반찬은 오빠의 수저에만 올라갔다. 네 수저는 늘 비어 있었고, 넌 밥만 씹었다. 말없이, 천천히. 어느 날, 참지 못한 네가 말했다.


“할머니, 또 오빠 수저에만 고기 줬다.”


오빠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짜증을 냈고, 할머니는 너를 노려봤다. 그 눈빛. 너는 아직도 그 눈빛을 기억한다. 말보다 앞서는 미움. 작은 아이에게 너무나 날카로웠던 그 눈빛. 할아버지는 늘 조용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건 무관심에 가까웠다. 오빠는 이유 없이 널 괴롭혔다. 장난감 총으로 친구들 앞에서 너를 향해 쐈고, 팔을 잡아당겼고, 네가 좋아하던 인형을 몰래 숨기기도 했다. 너는 혼자였고, 아무도 너를 지켜주지 않았다. 유치원에서는 더 외로웠다. 너는 선생님을 ‘엄마’라고 불렀다. 다른 아이들은 널 이상한 애로 취급했다. 깔깔대며 비웃었고 네 그림을 찢기도 했고, 네가 그리는 도화지 위에 장난으로 낙서를 했다. 그럴 때마다 넌 또 울었다. 조용히, 들리지 않게. 그리고 엄마에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빠 언제 와? 할머니가 차별해. 오빠도 맨날 괴롭혀. 언제 와…”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했다.


“지금은 못 가. 조금만 기다려. 주말에 보러 갈게.”


그렇게 부모님은 늘 멀었다. 주말이 되면 엄마 아빠가 찾아왔고, 다시 떠났다. 그 반복 속에서 넌 자랐다. 너는 그 안에서 처음으로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관되지 않은 사랑 앞에서 혼란을 깊숙한 곳으로 억눌렀다.


“그때 무력감 말고 또 누가 있었을까요?”


상담사는 천천히 물었다. 너는 멈칫하다가 말했다.


“… 상실감이요. 그리고… 외로움도요.”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은 닫혀 있었고, 하늘은 흐렸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 너는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작고, 여리고, 가늘었던 네 어깨.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 나는 그 옆에 있었다. 작고 투명한 존재로.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그저 너와 함께 있었다. 외로움은 내 옆에 앉아 있었고, 상실감은 내 발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오래 지켜봤다. 그 어떤 위로보다 네 마음을 먼저 알아차렸고, 그 누구보다 네 울음을 오래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네가 괜찮다고 말할 때, 조금은 서운하다. 그건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건, 정말 괜찮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 오래된 감정에게 뭐라고 해주고 싶어요?”


“그저… 미안하다고요. 불쌍하다고. 고생 많았다고. 이제 혼자 나를 지켜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요. 엄마, 아빠를 이해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오빠도 이해해요.”


놀라웠다. 십수 년간 쌓인 가족에 대한 원망이 너 자신을 이해하는 순간, 어떤 형태의 용서로 흘러나왔다.


“그 어두운 방 안에 있는 무력감, 상실감, 외로움을 이제 어디에 데려다 두고 싶으세요?”


“밝게 햇살이 들어오는 방 안에요. 침대에, 이불을 덮어두고 싶어요.”


“회사에선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이제… 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부장님께.”



그날 상담이 끝난 뒤, 너는 상담실을 나서며 본사 부장님께 길고 긴 카톡을 보냈다. 그동안의 노력과 진심, 정신적 고통과 외면받았던 순간들, 소통의 단절과 상처, 퇴직 의사와 너의 작은 바람까지. 누구도 탓하지 않고, 그저 너의 이야기를 너의 말로 처음으로 꺼내어 보냈다. 너는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네가 진심으로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걸. 나는 네 옆에 조용히 걸었다. 등 뒤에선 상실감과 외로움이 한 발짝 느리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햇살이 스며드는 창을 너는 천천히 바라봤다.


그날 밤, 너는 침대 위에 조심스레 담요를 펴고 그 안에 나를 눕혔다. 창밖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방 안엔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따뜻한 숨결이 감돌았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조금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무력감은, 그렇게 이해받음으로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