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에 담긴 진심

이해받지 못한 진심은, 억울함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머문다.

by 도진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상담사 선생님의 차분한 물음이 고요한 상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너는 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떼지 못했다. 손끝이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렸고, 시선은 바닥의 작은 얼룩만을 응시했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그 단순한 안부에 대답하려면, 그동안 품고 있던 복잡한 마음을 꺼내야 할 것만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너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상담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한 줄기 부드러운 햇살이 옆 탁자 위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창밖으론 화창한 늦은 오후의 하늘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지만, 마음속은 아직 흐린 안개가 가득한 듯했다. 따스한 빛줄기가 등을 토닥이는 듯했지만, 그 온기조차도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쉽게 녹여주진 못했다. 너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 지냈어요.”라고 대답해 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한결같지 못했고, 금세 떨려 나왔다.


사실 부장님께 퇴사 의사를 전하고 진심을 전달한 뒤, 많은 것들이 해소된 느낌은 분명했다. 하지만 점장님과 매니저님께 들었던 말들이 계속 마음에 남았고, 그런데도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너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미워하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억울한 걸까. 그 사람들의 말은 맞았다. 매출은 중요했고, 고객과 충돌하면 일이 되지 않는다. 그건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왜 마음은 이렇게 조용히 무너졌을까.


“점장님도, 매니저님도 저를 이해해 주시려 노력하세요. 특히 매니저님은 쌍둥이 아빠시거든요. 그만큼 책임감이 크니까요. 제가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상황도 다 이해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너는 또다시 ‘그들’의 입장을 먼저 설명했다. 그들의 맥락을, 그들의 상황을, 그들의 말 못 할 이유들을. “하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제 마음은 나아지질 않는 거예요.”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분명 제 말을 알아준 사람이 있었는데, 왜 제 기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걸까요?” 속에 맺힌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었다. 이해받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가슴 한편은 계속 답답하고, 서운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는데… 문득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도, 꺼이꺼이 울고 말았죠.” 말끝은 울먹임으로 흐려졌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이 한마디에, 상담사는 조용히 휴지를 건네주었다. 너는 감사 인사를 속삭이며, 눈물을 닦았다.


상담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했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고, 벽시계 초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만큼의 정적이 흘렀다. 방금 내뱉은 말들을 곱씹으며, 너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관리자들이 내 입장을 이해해 준 지금에도 가시지 않는 이 무거운 감정… 그건 도대체 무엇일까. “선생님,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됐어요. 이전 직장에서도 부당하다고 느끼면 감정 조절이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퇴사 말고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액션이 없었던 느낌이에요. 그럼, 제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뭘까요?” 너는 이제야 나를 네안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력감처럼 너 안에 깊게 뿌리내린 오래된 감정이었다. 어쩌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어린 시절에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 있었나요?” 상담사의 물음에, 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런 기분을 아주 어렸을 때도 자주 느꼈던 것 같아요.” 머릿속에 자연스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참 완고한 분이었다. 도덕성과 ‘정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어린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언제나 옳고 강직한 거대한 나무 같았다. 어릴 적 기억 속의 너는, 거대한 권위 앞에서 잔뜩 위축된 작고 연약한 가지와도 같았다. 따스한 이해의 햇살보다는 차가운 원칙의 그늘이 더 짙게 드리웠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한마디로 ‘정(正)’이라는 글자 같았어요. 도덕, 정의, 예의. 그런 걸 정말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공부를 못해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예의 없고 무례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한 번 ‘아니다’ 싶은 건, 끝까지 아니라고 하시는 분이셨어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바꾸는 일도 없었어요. 늘 선이 분명했고, 그 선은 누구도 넘지 못했어요. 저조차도요.” 아빠는 늘 바른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함부로 하지 않았고, 약속을 어긴 적도 없었다. 남들이 보면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런 평가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는 그 곁에서 자랄수록 자꾸만 ‘나쁘지 않지만 불편한 기분’을 품게 되었다. 아빠는 “너는 착한 아이야”라고 말하면서도, 네가 울면 “그럴 일 아니야”라며 다독이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먼저 이해해야지.” “그래도 너는 참아야지.” “그래도 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건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쌓일수록, 너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틀린 일을 하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저는… 어떨 때는 제 진심이 중요하지 않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에 담담함이 배어 나왔다. 잘못을 했으면 이유 여하 없이 꾸중을 들어야 했고, 설령 이유가 있더라도 그건 변명으로 치부되곤 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는 너의 행동 하나하나를 엄격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것이 너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다는 건,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너는 자주 답답했고, 서러웠다. 진짜 너의 마음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것 같아서.


그 시절 너는 나를 ‘억울함’을 절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억울해요”라고 말하면 더 크게 꾸중을 들을 게 뻔했으니까. 꾸밈없는 마음으로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었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네 안에서 자라났다. 말 못 할 감정으로, 눈물 대신 조용히 벽을 긁던 밤으로. 잠시 말을 멈추고, 너는 숨을 골랐다. 눈가엔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상담사는 조용히 다시 휴지를 건네주었고, 너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벽에 걸린 풍경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나의 존재. 나는 지금까지도 너를 따라다니며 문득문득 울컥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묵혀 둔 감정이 이제야 터져, 너와 나를 함께 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매니저님의 사정을, 점장님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올라왔을 때 너는 그 말을 더는 삼킬 수 없었다. ‘그분도 힘든 거 알아요.’ ‘저만 생각하면 안 되죠.’ 너는 그렇게, 늘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살면서 조금씩,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제발, 이제 그만. 다시 물어봐야 한다. “왜 나는 언제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왜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더 설명해야만 하지? “ 상담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흐르는 눈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천천히,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상담사가 아주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 억울한 마음… 그 감정이 옆자리에 앉아 있다면, 뭐라고 말하고 있을 것 같나요?” 너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맞은편의 빈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자리에 나는 앉아 있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바로 너 안의 나. 억울함이었다.


”나는 너의 억울함이야.”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네가 참아온 수많은 눈물과, 말하지 못한 진심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야.” 희미한 형체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나는 화만 내려는 감정이 아냐. 절대 유치한 투정도 아니고.”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떨렸다. 마치 오래 참고 참은 끝에 터져 나온 울음 섞인 항변처럼. “내가 왜 생겨났는지… 이제는 알겠지?” 너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부드러운 어조로 내가 말을 이었다. “네 진심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 그때 내가 태어났어. 네 마음이 외면당하고 억눌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자라났고. 아무도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심지어 너조차도 네 속마음을 꾹꾹 눌러 외면할 때, 내가 이렇게 커져버린 거야. “ 너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난 늘 네가 알아주길 바랐어. 네가 느끼는 이 서러움의 이유를. 너를 괴롭히려고 있는 감정이 아니야. 그저… 네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시당했을 때, 네 안에서 울고 있던 목소리일 뿐이야. 아버지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해 서럽던 그 아이의 마음, 그리고 현재의 너에게까지 이어져 온 오래된 감정… 그게 바로 나야.”


너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건넸다. “미안해… 그동안 너를 몰라보고, 오랫동안 외면해서 정말 미안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너에게 다가갔다. 흐릿했던 형체는 점점 또렷해졌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나의 얼굴은 어린 시절의 너와 꼭 닮아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작은 아이. 사랑받고 싶어, 단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던 아이. “정말 많이 답답하고, 속상했지…” 너는 나의 눈높이에 맞추려 조그맣게 몸을 굽혔다.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내 두 뺨에도 뜨거운 눈물이 타고 흘렀다. 해방이다. 완전한 해방감. 뻐근하게 조이고 있던 띠가 풀어진 듯, 숨쉬기조차 편했다. 나는 아직, 너의 가슴 깊은 곳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너는 이제 나를 억지로 눌러 담아두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나약함도, 잘못도 아니야. 진심이 상처받았다는 신호였을 뿐.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며 받아들인 순간 너와 나는 함께 가벼워졌다.


문득 상담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저녁 햇살이 살포시 기울어 창가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한결 부드럽고 따뜻해진 듯했다. 너는 비로소 눈을 들어 상담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깊이 이해하는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작게, 고요히 웃었다. 너의 마음속, 오랫동안 내가 ‘억울함’이 머물렀던 자리에 이제는 잔잔한 평온이 스며들고 있었다. 난 더 이상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천천히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담실을 채운 부드러운 침묵 속에서, 너의 눈물은 어느덧 말라 있었다. 대신 가슴 한편에는, 햇살처럼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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