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 친애하지는 않는 내 고지능 스펙트럼에게
정답은 3892139282야! (박수갈채)
쨔잔, 20자리 숫자를 순식간에 암산해 보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마지막으로 읽은 책 32페이지의 두 번째 문장을 읊던가요. 안타깝게도 둘 다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이네요.
“고지능자면 어떤 느낌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도 힘 빠지는 이야기를 하려니 저도 힘이 빠지네요. 그렇지만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데미섹슈얼인 게 어떤 느낌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예요. 저는 제 사고방식에 남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 아주 간접적인 방식으로 -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고지능자로서 제가 뛰어난 부분은 ‘언어 논리구조 파악’인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읽을 때마다, 광고 팝업이 떠오르듯 각 문단의 주제와 소재, 화제와 인상 깊은 문장이 자동으로 떠오르곤 했어요. 국어 자습서에 있는 것과 같은 ‘세부 해설’ 같은 내용 말이에요.
무언가를 기억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죠. 흔히 완전기억능력자들의 기억 메커니즘을 ‘사진을 찍듯이 상황 자체를 저장한다’고 말하던데, 저는 반대로 1) 중심 소재 2) 화제 3) 화자의 주장 4) 이런 것들에 대한 저의 의견 등의 내용이 압축적으로 기억에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A라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보죠. A가 꺼내는 말과 행동을 바탕으로 A라는 캐릭터의 배경이나 가치관 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머’는 아주 많은 정보를 압축적으로 전달합니다. ‘무엇을 재미있다고 여기는지’는 곧 발화자의 관심사와 미감, 가치관, 세계관, 성장 환경 등을 역추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지표죠. 그리하여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 해당 캐릭터의 더 많은 부분을 추론할 수 있게 되고, 해당 캐릭터가 미래에 선택할 행동 등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기억을 하지도 않고,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관측하지도 않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고지능자임을 깨닫고 나서도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어느 누가 자신의 기억의 작동 과정이나 생각의 흐름 등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싶겠어요. 답도 없고, 비교군을 구하기 불가능할뿐더러, ‘생각의 흐름’ 그 자체를 추적하는 일 자체가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이용하기에 상당히 머리가 아픕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썩 즐거운 일이 아니니까요.
저도 이런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살면서 질문들을 너무나 많이 들었어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제발 예시를 들어서 설명해 줄래?”, “생각을 조금만 더 천천히 설명해 줘. 이야기가 급 진전하는 느낌이야” 같은 것들 말이죠. 마치 특정한 생각의 방식이 ‘표준적’이며, 그 외의 모든 방식은 모두 ‘이질적’이며 ‘교정이 필요한’ 것처럼 여기는 질문들이요.
질문자들이 ‘특정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악의를 갖고 계시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시면 아실 거예요. 그 누구도 ‘표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본인들이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스스로의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심지어 이 ‘표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너무나 많이 바뀌기도 합니다. 인종, 성별, 세대, 계층, 가정환경, 직업 등등.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과연 자신의 사고방식이 표준적인가? 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면, 주변에 감사해야 할 때입니다. 주변에 전화와 문자를 돌려서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내 생각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씀해 주세요. 저는 살면서 ‘내 생각을 크게 곡해하지 않는 사람’ 혹은 ‘지저분한 설명 없이 내 말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단 두 명 만나봤던 것 같거든요.
물 한 잔 마시고 더 얘기해 볼까요. 다음 시간부턴 예시를 더 많이 들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