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논바이너리 7명에게 보내지 않으면....
‘시스젠더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뭘까요? 제가 먼저 맞춰볼게요! 아마 자연스럽게 본인이 남성 혹은 여성에 속한다는 감각 내지는 믿음일 것 같습니다. 동일 성별에 대한 소속감, 이상적인 여성 혹은 남성상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마 제가 논바이너리라고 생각해요. 아마 맞을 거예요. 위에서 서술한 ‘시스젠더로 존재한다는 느낌’들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아아, 예시를 들어야겠네요!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받는 질문들이니까요. 질문의 목적에 대해 설명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일엔 아주 익숙하니까요. 저를 좀 더 이해해 보려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하는 목적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춘기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요? 저는 제 몸이 ‘남성적’인 형태로 변해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했었거든요. ‘여성 호르몬 요법’ 같은 키워드들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던 기억이 나네요. 결국 성별 정정 관련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남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었지, 여성 혹은 다른 무언가에 속한다고 느끼지도 않았으니까요.
군대 얘기도 해볼까요. 동기들과 그들의 여자 아아돌 그룹 사랑을요. TV에선 항상 뮤직 X크, 음악 X 심 따위의 음악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취향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취향에 대해 아주 길고 장황한 대화를 나누곤 했죠. 어떤 그룹의 어떤 안무가 마음에 들고, 어떤 멤버의 특정 신체 부위가 좋고, 어떤 회차에서 입고 나오는 복장이 가장 좋으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에요. 음악 프로그램을 보지 않을 때면 그들이 등장한 예능 회차를 찾아보거나, 드라마와 그 여배우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했던 것 같네요.
그다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K-pop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이돌 그룹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도 딱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별로 가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했겠네요. 그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게임 중계를 보고 싶었습니다.
사회에 나오고 나서는 꽤 괜찮았습니다. 군대에서 했던 것과 같은 주제의 대화에 억지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적어도 저와 함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도 소위 ‘사석’에 가면 남자니 여자니 연애니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고 즐긴다고 하더군요.
그런 대화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대화 주제들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시스젠더들의 특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연기하듯 살았습니다. 소위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취미, 그들이 좋아하는 콘텐츠, 가치관이 무엇인지 연구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기를 하면서도 막상 그런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주제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남성의 역할을 거리낌 없이 잘 수행했고, 이에 만족할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죠. 시스젠더인 느낌은 도대체 뭘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법 달달하고 새롭고 짜릿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일 거라 생각해요. 세상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유대감이려나요? 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하겠지만요. 안타깝게도 시스젠더 본인들도 그 느낌을 자각하지 못할 거예요. 그들에겐 그러한 세계관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행일 테니까요.
정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성향/남성향 웹툰, 웹소설, 만화, 영화 등을 섭렵했습니다. SNS에서 유포되는 저질 콘텐츠들도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네, 남자는 ~~, 여자는 ~~ 하는 등의 제목으로 시작하는 끔찍한 콘텐츠들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통의 남자들-혹은 여자들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것들을 욕망하는지 같은 것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그룹 중 하나에 제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저는 제가 평생 ‘자연스러운 시스젠더의 특성’을 이해하거나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할 거란 사실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기지배처럼 찡찡거리지 말아라", “사내새끼가 이것도 못 하냐", “남자가 나보다는 키가 커야지”, “고추 달린 놈들이라면 자고로…” 같은 말들을 원어민답게 구사하지 못하겠죠.
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마음이 쓰리니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