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내 오랜 친구 '외로움'에게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y 비둘기

저는 아주 외로웠습니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저는 특정 성별에 이렇다 할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했고, 또래들이 ‘섹슈얼한 뭔가’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사고방식 자체마저도 뭔가 차이가 있었습니다.


“더 노력을 해보지 그래? 공통의 취미를 만든다던가”


결단코 저는 아주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정말이에요! K-pop 아이돌 멤버들의 이름을 외워보려 했고, 유행하는 드라마를 찾아봤으며, 유행하는 음식들을 먹어보거나 SNS에 잡다한 일상들을 올리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그 콘텐츠에 대한 감상과 콘텐츠를 즐기는 방법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기껏 아이돌 음악을 들어도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이 TV 프로그램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사를 부르짖는 위화감’ 같은 주제에 흥미가 갔습니다. 투팍과 비기를 들을 땐 ‘내전’ 개념으로 west cost와 east cost의 분투를 해석해보려 했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에도 ‘영화와 드라마의 러닝타임 차이에 따른 메시지 밀도의 차이’ 같은 소재들에 집중했습니다.


반면 다른 친구들은 어떤 아이돌 멤버가 가장 예쁘거나 섹시한지, 주인공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게 나오는지, 래퍼들의 라임과 랩스킬이 얼마나 죽여주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더군요.


그들의 대화가 유치하거나 수준이 낮았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대화가 안 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재나 화제의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 그 자체에서 뭔가 이질감이 있었습니다. 재미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고요. 어제 본 아이돌 뮤비의 색감과 안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mp3 플레이어의 대중화가 후크송의 범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장광설을 재밌게 들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들과 꽤 많은 것들을 공유했습니다. 학교에서 만났으니 나이가 비슷할 것이며, 같은 지역구에 살기에 생활환경이나 계층 같은 요소들도 비슷했을 것이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겉돌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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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또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저에게 친구가 있는지, 학창 시절에 친구들은 있었는지, 연애는 해본 적이 있는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스타일은 아닌지 말이에요.


지금도 친구들이 있고, 학창 시절에도 마찬가지였고, 연애도 충분히 해보았습니다. 독립심은 매우 강한 편이에요. 혼자서 외국 생활도 1년씩 두 번 해봤을 정도로요. 그러니까 ‘슬슬 크리스마스인데 옆구리가 시리다’, ‘너도 이제 슬슬 연애할 때가 되지 않았냐’, ‘이사 왔더니 동네 친구가 없어서 외로워요’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어쨌거나 저는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불교나 에반게리온에서 말하는 근원적인 외로움과 고통에요.


일반적인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대충 친구들과 술을 밤새도록 마시거나,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얼렁뚱땅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요소들 - 논바이너리, 데미섹슈얼, 그리고 고지능 스펙트럼 - 에 의해 증폭된 외로움. 이게 제가 평생 싸워온 적이자, 언제 어디서나 제 곁에 함께 했던 친구였습니다.


앞으로는 굳이 ‘외로움'이란 소재를 제목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모든 글은 존재론적 외로움이란 소재로 회귀하니까요.


잠시 쉬었다 이야기해볼까요. 사랑에 대해서요! 여러분들이 정말 좋아하시는 바로 그 소재! 상세한 예시들도 많이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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