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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Nov 30. 2018

아날로그 새터데이

인터넷 없이 보낸 하루

#KT #조용한 #아날로그



1.

토요일 점심은 참 조용하고 맑았다. 통신사 화재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핸드폰은 곤히 잠들었고, 늦을 것 같아 늦춘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신촌역은 따사롭게 해가 비쳤다. 옛날 사람처럼 '서점 앞에서 만나'라고 약속을 했고, 추위에 입김을 내는 사람들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 버스커 커플을 보며 연인을 기다렸다. 목소리가 참 예뻐 지갑을 열어보니 천 원 한 장이 있어 그들의 작은 박스에 넣어주었다. 얇은 지갑에 카드만 남았다. 인터넷 없는 세상에 카드가 그렇게 쓸모없을지는 아직 몰랐지. 곧 설렘을 가득 안고 네가 왔다.


2.

새로 나온 라이언 립밤이 있어 화장품 로드샵에 들어갔다가 인터넷 문제로 카드가 안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현금이나 계좌 이체만 가능하다고 죄송하다고 하시는 직원분에게 현금도 없고 둘 다 KT라 계좌 이체도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직원분도 통신사가 KT라며 셋이서 웃고 다음에 매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유쾌한 피해자들이 되었다.


카드가 안 되는 것은 카페들도 같았다. 우리가 자주 찾던 스타벅스도 언젠가 들렸던 크레마 커피도 KT라 결제가 안된다고 해 문을 다시 나서야 했다. 파리바게트에 가서 혹시 카드 결제가 가능하냐고 여쭈어본 후에야 다행히 따뜻한 커피 한 잔 사 마실 수 있었다. 현금다발을 들고 다니는 남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3.

데이트할 때 핸드폰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날은 더더욱이나 핸드폰을 손에 들 일이 없었다. 간신히 핫스팟을 열어 계좌이체를 받아주신 작은 카페에서 잠깐 문명 세계와 인사했을 때 정도였을까. 덕분에 이야기할 것이 항상 많은 우리는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핸드폰 볼 일이 하도 없어 집에 갈 시간을 놓칠 정도로.


여자친구를 집에 바래다준 후에 집에 갈 차편을 찾는 것도 인터넷 없이는 힘들었다. 지하철 막차를 환승할 수 있는 열차는 이미 5분 정도 전에 이곳을 떠났고, 버스가 아마 1시간 후까지는 있던 것 같지만 집으로 가는 정거장도 용산구 안에 있어 가보기 전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선선해 천천히 걸어 지하철을 타고, 또 내려 정거장으로 걸어가 다행히 버스를 탔다. 아날로그 한 하루.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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