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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May 02. 2019

자부심에 대한 고민

일흔다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2017.03.21


To. 콩 아가씨


 문득 궁금해졌어요. 대체 나의 자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지난 수요일. 새벽 4시부터 토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화 아닌 화를 냈었던 기억이 나요. 그다음 날은 또 야간 비행을 지원하느라 11시도 훌쩍 넘겨 퇴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친구 고생시킨다고 이 놈의 군대에 대해 원망 아닌 원망을 쏟아내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의아하지만, 그런 당신에게 나는 조금 완고하게 반대의 의사를 내비쳤던 것 같아요. 남자친구가 힘든 것이 싫은 연인의 마음을 이해 못한 것도 아닌데, 그 반대표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자부심이었던 것일까요.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금은 갑갑하게, 분명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로 지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아깝긴 하지만, 나는 그래도 내 군생활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평생 군과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대가가 고작 2년이라는 시간이라고 친다면 꽤나 값싼 대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나의 일이 된 항공기 토잉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알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때때로 정말 중요한, 신기한 임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요. 수줍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수요일 새벽의 근무는 총리를 모실 항공기들을 지원한 것이었고 목요일 밤늦게 있었던 근무는 말레이시아 에어쇼에 참가한 블랙이글스 팀을 공수 지원한 항공기를 지원하는 것이었어요.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평생 해보지 못할 경험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근무를 나갔고 또 즐겼던 것 같아요. 무언가 새롭고 대단한 일들의 일부가 되어보면서요.


 주말에 단장님 운전병을 하고 있는 동기형과 이야기하면서 또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유학을 떠난 전 여자친구 소식을 듣고 와서는 자기는 이곳에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형이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했지만 위로차 한 마디 건네었어요. 형도 지금 한 나라의 장군을 모시고 있는 거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군인이고, 다 함께 불쌍한 신세에 할 수 있는 자기 위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하는 일들은 크고 작은 임무들에 끼워 맞춰져 있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들 일지 모르지만, 결국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것 역시 이 톱니바퀴들이고, 우리가 했던 일들 없이는 이뤄지지 못했을 테니까요. 의무라는 단어에 기대지 않고, 걱정받고 동정받고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일들. 때때로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가치를 찾고 해내어가는 이 과정이 자부심을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풀이 죽어있던 형도 저 한 마디에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더라고요. 세상에 장군님 모셔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며 말이에요. 많긴 할 거야 라는 말은 잠시 넣어두고, 기분이 풀린 형과 잠시 더 시간을 보내고 즐겁게 보내줬네요.


 참 쓰기 어려운 편지였어요. 거의 일주일이나 걸렸거든요. 그 사이에 상병도 되고, 사격도 한 번 하고, 야간 기지 방호 훈련도 했네요. 이제야 겨우 벽돌 3개. 상병이 되긴 했지만 참 변한 것 없이 즐겁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요. 조금 늦춰졌던 휴가가 다시 원래대로 나갈 수 있게 돼서 곧 당신을 보러 가게 되었어요. 항상 보고 싶고 사랑해요. 얼른 편지가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2017.03.21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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