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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Jun 15. 2019

궁궐의 안내판을 보던.

여든여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 공항

To. 콩 아가씨


 오랜만에 이번 주말은 썩 만족스러웠어요. 물론 아침 7시에 출근해야 했긴 하지만 미리 빌려두었던 DVD 'Her'도 아침부터 볼 수 있었고, 평화로운 오전을 틈타 빨래를 하기도 하고 짬을 내서 도서관도 다녀올 수 있었어요. 성실히 조금조금 공부해오던 '포지셔닝'도 노트에 다 정리해서 끝마쳤고, 주말에만 잠깐 느슨하게 풀어주는 다이어트에 맞추어 오랜만에 삼시세끼 다 챙겨 먹기도 했죠. 일요일에는 할까 말까 생각만 해오던 잡지 스크랩을 시작했고, 저녁에는 맙소사 라면 쿠커에 옥수수유를 넉넉하게 올려 튀김을 해 먹었어요. 냉동으로 사서 전자레인지에만 돌려먹던 치킨들을 드디어 미친척하고 튀겨먹어 봤네요. 집에서도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해 먹진 않았었는데 말이죠. 다음에 이 멤버끼리 근무를 하게 되면 돈가스를 튀겨 먹어볼까 해요. 열심히 각자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괜찮은 주말이었어요.




 당신이 참 좋아할 것 같은 책을 읽고 있어요. 이름하여 '궁궐의 안내판이 바뀐 사연'. 우리 도서관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성남시 중원도서관에서 순회문고라는 이름으로 흥미로운 책들을 빌려와요. 이 책도 그 순회문고에서 빌려온 책인데, 공공디자인의 일환으로 서울 궁궐의 안내판들을 민간 기업들과 정부가 함께 3년여의 시간 동안 다시 디자인해내는 프로젝트를 담아둔 책이에요. 궁궐을 좋아하는 우리가 그동안 이리저리 쏘다니며 보았던 그 안내판들 뒤에 숨은 이야기라고 해서 냉큼 집어왔네요. 사실 지난번에 같이 경복궁에 갔을 때 이 안내판을 보면서 속으로 좀 감탄했거든요.


 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이란 역시나 만족스러웠어요. 내 흐릿한 기억 속에 있던 과거의 안내판들을 자료사진으로 접했을 때는 좀 경악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안내 체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어떻게 궁궐이라는 공간을 이해해야 하는지부터 안내문을 만들어내는 작업 과정, 레이아웃 디자인과 제작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둔 것들과 서체, 픽토그램, 색채 등의 결정. 그에 더해 이 프로젝트만을 위해 궁궐의 조감도 지도를 새롭게 그려낸 것까지. 역시 2만 5천 원짜리 책은 다르구나, 이런 책들 읽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라는 감상이 들 정도로 유익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옛날에 박물관학을 공부하며 둘이서 박물관들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돼요. 자기가 좋아하고 해보고 싶던 일을 공부해보려고 고대에서 서울대로 학점교류를 하러 간 여학생과 직접 전시를 꾸려보며 그 뒤의 세상을 구경했던 남자애가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수업이기도 했지만 데이트이기도 했고, 덕분에 서로가 점점 더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보아준 순간들이었죠. 이 책을 보니 소싯적에 그런 공부를 했던 우리가 새록새록 떠오르더랍니다. 3년 하고도 반 조금 넘게 예쁘게 사랑하고 다니니 별별 추억이 다 생기나 봐요.


 당신도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2만 5천 원짜리 책을 살 수는 없으니 다른 대안들을 마련해봐야겠어요. 내 독후감을 안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도 좀 번거로운 일이니 다음에 같이 창덕궁이나 한 번 가볼까요? 그동안과는 다른, 조금 색다른 가이드를 해드리도록 할게요. 어때요? 나 지금 편지 두 장 써서 데이트 신청하는 중이에요.


 사랑해요.



2017.08.22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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