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우 Jun 17. 2019

추억을 쌓으며 읽었던 글들

여든아홉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요즘에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자요. PMP에 빗소리를 틀어주는 앱을 다운받아 왔거든요. 낙엽 위의 빗소리, 지붕 위의 빗소리, 모닥불에 빗소리. 참 다양한 빗소리에 피아노 멜로디를 곁들일 수 있는 옵션도 있어서 잘 때마다 그날그날 듣고픈 소리를 틀어두고 잠을 청하고 있어요.


 이제는 10월. 추석도 곧 다가오고 누가 봐도 가을이라고 할 만한 날들이 달력을 스쳐 지나가는 중이에요. 물론 이번 가을은 이상하게도 아직 낙엽이 안 떨어져서 가을 풍경 답지 않은 면도 좀 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을. 하늘은 높고 사람은 살이 찝니다. 군대에서 보내는 모든 계절은 두 번이 다예요. 봄도 여름도 가을 겨울도 딱 두 번. 이미 1년이라는 시간을 곱게 접어 삶의 책장에 끼워둔 우리에게 이 가을은 이 곳에서의 마지막 가을이 되겠죠. 익숙해진 것들과 익숙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군인 시절을 잘 보내고 있어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데 조금 익숙해지고, 더 이상 배울 일이 없어지고 매일매일에 익숙해져 모든 것들에 무감해지는 한편, 한 때 우리가 서있던 자리에 발을 들인 이름 모를, 얼굴 모를 후임분들께 경례를 받으며 어색해하기도 하고 있어요. 120명이나 되는 수송대대에 이제는 나보다 높은 이들이 20명 남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하고, 허물없는 친구가 된 맞선임들이 벌써 병장이 되었구나 하면서 다음 차례는 우리라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을 때도 있고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았던 두 번째 여름과 두 번째 가을에, 우리네 세상은 조금씩 빛깔이 바뀌었나 봅니다. 우리 몰래 바뀐 구석구석을 가끔 돌아보며 웃기도 하고, 당혹스러워하기도 하며 나름의 추억을 잘 쌓아가고 있어요.


 이번 연휴에는 길고 긴 휴식을 틈타 같은 방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새벽 4시, 그다음 날도 4시. 덕분에 근무가 없는 날 아침이면 다 같이 눈을 붙여야 하기도 했지만 각자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기꺼이 나누고, 서로가 부러워하는 서로의 모습들을 말해주고, 잊거나 잊을 뻔했던 이야깃거리들을 되새기는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다 큰 어린이가 되어 만든 친구끼리의 시간. 평소에, 아니 군대에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들의 이야기는 아마도 서로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을 거예요. 부디 그 여운이 기분 좋고, 따뜻한 뒷맛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슥슥 이런저런 문장들을 적어내게 되네요. 지난 휴가에 조금 바빠 이렇게 투덜투덜, 도란도란 이야기할 시간을 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던 것일까요. 요즘 읽는 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조금 남겨야겠어요. 요즘에는 새 글들과 옛 글들을 번갈아 읽는 중이에요. 새 글 중에는 도시와 그 구조들 속에 담긴 문화와 지혜들을 다룬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고, 옛 글 중에는 아멜리 노통브의 '황산'을 골라서 읽는 중입니다. '황산'은 지난번 휴가 때 책장에서 뽑아 들고 간 책인데,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글이 어떤 글이었지 하는 마음에 펴 들곤 단숨에 읽어버렸어요. 역시 좋더군요. 처음 읽었을 때만큼 좋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시절의 나를 잠깐 빌려오기에는 충분한 글이었어요.


 우연히 '황산' 말고도 좋아했던 옛글을 하나 더 만나기도 했어요. 옛날에 읽었던 잡지에 인용된 시였는데, 그 시가 이번 달에 새로 도착한 다른 잡지에 고스란히 담겨있더라고요. 정말 좋아했던 시라 보자마자 알아보았어요. '바람의 지문'이라는 시인데, 누군가에게 빌려준 책에 남은 그의 지문을 바람이 수놓은 투명한 꽃무늬라고 적은 아름다운 시예요. 정기구독 중인 잡지인데, 구독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오랜만에 본 예쁜 글이라 기분이 묘하게 좋았네요. 요즘은 이렇게 맛난 글들을 맛보는 중이랍니다.


 연휴가 9일이나 있는 10월이지만, 연휴가 끝나면 조금 바빠질 것 같아요. 10월은 공군 최대 규모의 행사인 ADEX가 열리는 달이거든요. 전 세계의 항공기가 서울공항에 도착하고, 이리저리 일감이 쏟아져 정신이 없을 거예요. ADEX 때는 병장이겠지만, 우리가 병장이라고 일 안 하는 부대도 아니라 열심히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일하고 오렵니다. ADEX가 끝나면 곧 휴가를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사랑합니다.



2017.10.04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스러운 여행자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