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집
왁자지껄한 마무리였어요. 다 같이 연말 프로그램을 보며 앉아있다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거든요. 새해가 밝을 때 제2 롯데월드 타워에서 불꽃놀이를 한다고 해서 시간에 맞추어 구경을 나갔죠. 일병 막내 시절에는 생활관 안에서 제2 롯데월드가 보였는데 병장도 달고 이사도 수도 없이 하고 나니 다른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고요.
참 묘한 느낌이었어요. 서른 명 남짓 되는 남자애들이 다 같이 오들오들 떨며 불꽃놀이를 보는 것도 장관이었지만, 또 생각만큼 불꽃놀이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외친 '전역의 해가 밝았다!'라는 소리에 이 중에 반은 2018년에 같은 일로 기쁜 날을 맞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 우리 전역하는구나. 5월이 되려면 그래도 꽤나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그 수간은 정말로 전역이 가깝게 느껴졌어요. 몇 분 차이로 2017년이 2018년이 된 것뿐인데 뭐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새해가 오고 분주히 새해인사가 오가기 시작했어요. 짧고 의례적인 인사들도 많았지만 중간중간 그보다는 조금 길고, 애정이 담긴 새해인사들도 도착을 하더랍니다. 2017년에 어떤 일들로 참 고마웠다는 인사들. 자주 연락을 했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작년에 거의 3, 4년 만에 만난 친구도 있어 놀라웠어요. 정말 중요했던 시기에 나를 만나 큰 도움을, 위안을 얻었다고 하는 아이들. 나도 참 즐겁고 좋았던 날인데, 그 따뜻한 새해 인사를 받고 나니 그 날의 기억에 추억이 한 꺼풀 덧입혀지는 것 같았습니다. 추억은 함께할 때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추억을 기억하는 방법으로도 서로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마워해 줘서 고맙고, 내가 해준 말들을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라서 고맙다는 답장을 하나 더 남겼습니다.
아, 지난 금요일에는 비행단에 피스아이 조기경보기가 도착했어요. 합참의장님이 새해맞이 지휘비행을 하신다는데, 기상이 좋지 않아서 야외에 주기하는 것 대신 격납고에 넣어둔다고 하더라고요. 2호기와 같은 B-737 기종 기반의 항공기이지만 아무래도 아무도 안 해본 기종인 만큼 제가 근무를 나갔어요. E-737 피스아이 같은 대형 기종은 격납고에 넣을 때 꼬리날개를 좁은 공간에 맞추어 넣어야 하는 고난이도 토잉이 필요해 정말 어렵거든요. 항공기가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은 후에 바로 차를 타고 근무에 나섰습니다.
처음 항공기를 봤을 때는 조금 놀랐어요. 분명 B-737 기반의 항공기라고 했는데 본체 위에 붙은 레이더 때문인지 꼬리날개가 무지막지하게 크더라고요. 대형 기종은 터그 차 안에서 꼬리날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토잉을 할 때 정비사들과의 수신호와 운전자의 감에만 의존해서 토잉을 해야 해요. 그래서 꼬리가 크면 클수록 토잉 하기가 까다롭고 무섭죠. 무게는 또 어찌나 무거운지, 지금까지 토잉 해본 그 어떤 항공기보다 중량이 커 이번 토잉에는 브레이크뿐만 아니라 가속 페달을 번갈아 밟아야 했습니다. 이 친구가 평소에 대기하는 비행단에서는 우리 터그 차보다 더 큰 터그 차를 운용한다고 하네요.
다행히 주기는 환상적으로 끝났어요. 그렇게 모든 신경을 다 쏟아 토잉을 해본 것이 정말 오래간만이라 끝나고 나서 식은땀이 다 흘렀습니다. 토잉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는지 토잉이 끝나니 중령급 인사가 찾아와 잘했다고 칭찬도 해주셨어요. 중대에 돌아갔더니 터그 카 지원 요청을 총괄하는 타워에서도 아까 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진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셔서 얼떨떨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작차중대가 토잉 하고 이렇게 칭찬받은 게 처음이라 다들 신기해하며 그 날 근무를 마쳤네요.
알고 보니 원래 주둔하는 비행단에서는 우리 같이 꼬리 부분을 따로 넣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 높이가 꼬리에 맞춰져 있어서 이런 격납고에 집어넣는 것은 처음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모두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작업을 했었나 봅니다. 물론 대당 4,500억 원짜리 비행기라는 것도 영향이 있었겠죠? 어쨌든 이걸로 정말 공군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 같아요. F-4 팬텀 딱 하나만 토잉 해보지 못했는데 그거는 뭐 어쩔 수 없겠죠. 이제 전역해도 될 것 같은데, 4달 하고도 반이나 더 남은 관계로 또 열심히 토잉 하다 나가야겠어요.
아들의 새해는 이랬는데, 우리 가족은 어떤 새해를 보냈으려나 궁금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곧 나갈게요. 사랑해요.
2018.01.01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이번 커버 이미지는 공군 공감의 포스팅 (https://afplay.kr/1966) 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