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좋은 휴가였어요. 물론 휴가 내내 약속이 있어 바쁘긴 했습니다만 마음을 달래는 일로 바빴던 일주일을 피곤했다고 할 수는 없지요. 내 삶을 나누어 보낸 많은 이들을 만났어요. 가장 많은 마음을 나눈 당신과 이틀을 보냈고, 대학생이 되어 만난 친구와 하루,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함께한 친구들과도 하루. 그리고 가족들과 보낸 나머지 하루.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휴가가 다 지나갔더군요. 서로를 함께 빚어온 이들 곁에서 보내는 연말은 참 편안했어요.
딱히 위로의 말이 오갔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디 가서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스타일도 아닌 데다가 굳이 알리기를 꺼리는 심술 맞은 성격이라 힘든 티를 잠깐 내다가도 발뺌하기 일수거든요. 하지만 이 까끌까끌한 한 해를 다독이기 위해서 꼭 이런저런 위로의 말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어요.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잡지를 몰래 준비해 가져온 당신을 보면서, 열심히 골라온 정갈한 식사 한 끼를 함께 먹으면서, 예매해둔 연극과 전시를 보고 손을 잡고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줄곧 마음의 녹이 살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어요.
내 덕에 의대에 합격했다는 고맙고 반가운 소식을 들고 온 친구를 만나, 골치 아픈 생각을 나누며 먹었던 일본식 달걀말이 초밥을 다시 찾았을 때도 그랬고.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하며 마음껏 바보짓을 할 때도, 다 함께 방탈출 게임에 성공하고 난 후에도 그랬죠. 하필 납치된 역할이라 침대에 수갑으로 묶여 시작했던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가 차에 넣어둔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을 들으며 부대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아빠가 젊었을 적 산울림의 노래를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이번 휴가는 그렇게 계속 마음이 좋았어요. 23살의 마지막 휴가는 그렇게 더없이 좋았네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보니 당신이 서운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어요. 평소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 지면을 많이 나눠주었으니 혹시나 질투를 하려나 싶은 거지요. 여전히, 내게 가장 좋았던 시간은 당신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였어요. 맛 좋은 베이글과 달콤한 타르트가 기억 군데군데 박힌 그 이틀 속에 당신은 참 예뻤고, 예쁘게 꽃 피운 미소는 2017년에 남겨두기 아까울 정도였죠. 2017년 앨범은 이미 당신 예쁜 사진으로 한가득이니까요.
고마운 휴가를 뒤로 하고 이곳에 돌아왔어요. 숨 가쁜 한 해를 뒤로 하고 이곳에 왔고, 스물세 살어치 추억을 안고 이곳에 왔네요. 행복합니다.
2017년 12월 마지막 주.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