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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Jun 19. 2019

불면증

아흔여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어제는 눈이 많이 왔어요. 소복하게 쌓이는 함박눈.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오늘도 푹신한 눈빵들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네요. 여행을 다녀온 당신을 맞는 이 겨울은 추워도 참 부드럽군요.


 겨울은 내가 참 좋아하는 계절이었는데, 이번 겨울은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춥고, 시리고, 아려요. 잠에 쉽게 못 드는 밤이 많고, 나답지 못하게 이곳저곳 아프고 쑤시는 낮이 많은 겨울. 그래요 아가씨. 오늘은 있는 힘껏 투정부리는 편지를 써볼까 해요.


 한 장 가득 당신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있던 좋은 일들을 적었다가 조심스레 편지를 접어넣었어요. 잘했어요와 좋았어요로만 장식된 그 한 장을 다시 읽어보는데 정말 별로더라고요. '나 잘 살고 있어요'라고 한가득 변명을 늘어놓은 것만 같았거든요. 그렇게 잘 살고만 있는 것은 아닌데, 잘 살고 있는 시간만을 조심스레 오려 붙인 그 소식을 당신에게 보내주어도 되는 것일까, 그 소식이 과연 내 소식이 맞는 것일까 싶어 편지를 다시 쓰고, 고치고, 미루며 나의 연인에게 보내줄 문장들을 다시 적어보고 있네요.


 요즘 잠을 못 자요. 불이 꺼진 어두운 방천장을 바라보며 자리에 누우면, 암순응을 끝낸 눈에 천장 구석구석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해요. 세상의 온갖 소음들과 그에 발 맞추어 고개를 드는 생각들이 한바탕 지나고 나면, 그 때 즈음에야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곤 하죠. 생각의 대부분은 길을 잃고 흩날리는 불안감들이에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열심히 힘을 들여 쌓아둔 것들이 과연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너무 많은 것들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내 생각만큼 유능하고 끈질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닐까. 혹시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꼭 불어낸 풍선껌처럼 어느순간 톡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불안과 부담감에 흠뻑 젖어 해야만 하는 일들을 떠올리면 이 겨울은 참 춥고 버거워요. 좋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에 삶이 따라가자주지 못하면 조금 슬프고, 멋진 사람이 되고픈 계획을 못 따라가면 또 조금 슬프고. 자존감에 구멍이 생겨버렸나 봐요.


 연말이라 그런지, 다들 학사모를 쓸 준비를 하다보니 그런건지. 고마움을 표하는 친구들이 가끔 연락을 걸어주어도 요즘은 내가 그 말이 어색해서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요. 너 아니었으면 대학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맙다고 말해주는 그 말이 참 고마우면서도 내가 그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인지 의아해서 속으로는 조금 부끄러웠어요. 요즘 군대 안에서는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도 좋지 않지만 여전히 나의 사소한 못남을 부족한 잠과 스트레스 탓으로 돌리는 것도 좋지는 않으니까요. 못난이가 되어버려서 마음이 아픈 것도 스물 셋의 겨울이겠죠.


 투정부리는 것도 사실은 내가 잘 못하는 일이에요. 플래너에 3일째 편지쓰기라 적어두고 진도를 빼지 못한 것만 봐도 내가 투덜이로 성공하기는 글러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편지를 이어서 쓰게 된 것이 당신과 한 시간도 넘게 통화한 후라는 것이 참 묘해요. 다독여 주세요.라고 글을 쓰는 것도 버거워하던 나를 당신이 몰래 이렇게 다독여놓았으니까요. 하루만에 다 녹을 눈은 아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풍경은 달라지니까, 나는 당신이 참 고마워요. 내일 모레 당신을 보러가면 있는 힘껏 당신을 좋아해볼 계획입니다. 내 삶을 매만져주는 바람을.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설레는 날이 다가오고 당신이 참 보고싶네요.

 사랑해요. 보고싶어요.



2017.12.23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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