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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Jun 19. 2019

겨울이 왔어요.

아흔다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기준은 명확해요. 우유를 창가에 내어두어도 되면 겨울이 온 거예요. 겨울이 왔고, 슬슬 창가에는 아껴둔 우유들과 휴가를 기다리며 장만해둔 팩들이 올려지기 시작했어요. 초록 내복을 뽐내는 친구들이 늘어났고, 휴가를 나갈 때 별을 보는 날이 돌아왔죠. 주말이면 겨울잠 자는 곰돌이들을 뒤로하고 배고픈 곰돌이들이 하나둘 모여 밥을 먹으러 가고, 달력에는 빨간 글씨의 설렘으로 적어둔 크리스마스라는 글자가 둥둥 떠있어요. 새하얀 입김을 뿜어대는 사람들을 따라 바닥이 히끗한 살얼음을 뿜어내면, 도시에 밀리터리 펭귄들이 출몰하고, 곧이어 하늘에서 쓰레기가 떨어지면 귀마개를 눌러쓴 너구리들이 오늘 내린 쓰레기가 녹는 쓰레기인지 안 녹는 쓰레기인지 고민하며 한참을 서있을 거예요. 대장 너구리가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너구리 굴에서 탄성과 환호성이 교차할 테고, 마늘 쑥 다이어트를 거의 다 끝낸 말년 곰돌이들은 이 모습을 보고 군생무상을 느끼며 남몰래 이삿짐을 꾸리겠죠. 겨울이네요 아가씨. 겨울이에요.


 이제 딱 한 장이 남은 달력. 월별로 한 장씩 달력을 만들어 둔 것을 빼면 노트나 다름없는 내 다이어리도 이제 열 장 남짓밖에 남지 않았어요. 솔직히 모든 페이지를 글씨로 빼곡하게 채운 것은 아니지만 다이어리 한 권을 다 채운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해야 했던 일들과 열심히 읽고 옮겨 적은 것들. 아이디어들과 짤막한 글 조각들. 몇 개월치씩 쪼개서 만들어진 계획표들과 블로그를 위해 적어둔 수많은 초안들. PPT 스토리보드와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 2017년에는 이 많은 것들이 꼬깃꼬깃 접혀 들어가 있는 것이군요. 얼마 남지 않은 나머지 2017년도 마저 잘 접어 넣으면 이 한 해는 참 통통한 한 해가 될 것만 같습니다. 2017년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에는 벌써 2018년의 일들이 가득해요. 1월 1일, 새로 오픈할 블로그의 포스팅 플랜과 그 포스팅들을 열어줄 짧은 첫 문단들이 염치 불고하고 벌써 다이어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로에게 선물했던 2018년도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는 소식에 조금 놀랐다가 2018년 다이어리에는 2017년 12월이 마련되어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그렇죠, 다이어리 업계에도 혁신적인 환승 시스템이 진즉에 들어서 있던 거예요. 12월은 반은 2017년이고 반은 2018년인 시간인가 봅니다. 이미 텍스트는 2018년으로 이사한 나의 다이어리도 얼른 남은 페이지를 메모로 채워 넣고 새로운 다이어리로 넘어가려고 해요. 당신과의 약속을 캘린더에 적어두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 둘 채워 넣어 두면 2018년도 금세 우리의 해 같이 느껴지겠죠. 20일도 더 남은 해를 이렇게 얼렁뚱땅 몰래 맞이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2017년의 다이어리처럼 가득 채워두기 위한 준비라고 친다면 미리 해두어서 나쁠 것 없겠죠.


 겨울이에요 아가씨. 춥게 지내지 말고, 따뜻한 생각들 속에서 날 기다려주세요. 생각해보니 이번 주말에는 교토를 다녀오겠군요. 할머님이랑 어머님 잘 모시고 다녀와요. 다녀오면 내가 수고했다고, 잘 다녀왔다고 다독여줄게요. 사랑해요.



2017.12.07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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