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항상 이길까

언제나 위너인 자식

by 별아라

토요일 오후 네 시, 퇴근길에 대형마트에 들렀다.

마트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0분.

“이 정도는 들 수 있겠지?”

택시비가 아까워 물건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추석이 다가와서인지 마트엔 사람이 북적였다.

더 돌아다니다간 계산대 줄이 길어질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스컬레이터 앞 명절세트 코너

엄마 아빠가 보였다.

아뿔싸.

멀어서 이쪽까진 안 올 줄 알았는데

거래처 선물을 사러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몸이 얼어붙었다.

아직 날 못 본 것 같은데…

뒤돌아서 갈까?

그냥 지나칠까?

마스크도 썼는데, 못 알아보겠지?


이미 내 몸은 모르는 사람인 척 연기를 하며

앞으로 걷고 있었다.


“아라야.”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라야.”

이번엔 아빠가 내 카트를 붙잡았다.

‘아, 돌아서 갈걸.’

후회가 밀려왔다.


“얘기 좀 해 아라야, 응?”

“이거 놔, 그만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카트를 꽉 잡고 있던 아빠의 힘이 풀리는 거 같았다.

잽싸게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아빠가 따라올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따라 타면 어떡하지?

카트를 버릴 수도 없는데


그날따라 에스컬레이터는 유독 답답하게 올라갔다.




종량제 20리터 봉투에 물건을 꾹꾹 눌러 겨우 담았다.

마트에서 나와 택시를 탈까 말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젠 안 올 거 같았다.


머리는 정신없었고 발걸음은 쉬지 않았다.

신호등에 걸려 겨우 멈췄다.


그제야 얼얼한 손목을 보니

이미 빨간 줄 몇 겹이 생겨있었다.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허탈했다.



오늘 깔끔하게 입길 잘했다.

남자친구랑 같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카트에 물건이 좀 많아 보였을 라나?



생각보다 괜찮군.

인상착의 체크를 마치자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난 아빠 얼굴만 보면 심장이 아리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면서도

내게 안절부절못하는 아빠가 안쓰럽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져주지.

아빤 늘 나에게 져줬었다.

내가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려던 그날,

나에게 모질게 말한 건 그 하루뿐이었다.


그날 아빠는 돌아가는 길에 분명 후회했을게 뻔하다.

그럼에도 걱정이 됐다.

혹시 이번에는 정말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역시, 아빠는 날 못 이긴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걱정되었던 내 마음이 그제야 풀렸다.




집에 도착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빠의 부재중 전화, 그리고 엄마의 카톡 하나.


청년도약계좌 기사 링크와

”통장개설하고 계좌번호 줘.”

이 말 한마디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진짜 집을 나온 게 맞긴 한 걸까.


사실, 솔깃했다.

이렇게 동생까지 버리고 집을 나왔는데

돈을 보내준다고?

계좌를 보낼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차게 집을 나와놓고

이 정도 말에 흔들리는 내가 어이없다가,


자식이 이렇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계좌번호 달라는 말을 던지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집을 나온 건

내가 진짜 힘들다는 표현이었는데

이것조차 무시당한 것 같았다.


다시 엄마에게 무력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으니까 돌아오라는

엄마의 표현이 참 서툴다.


엄마는 왜 항상 나에게

이렇게 서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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