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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Feb 17. 2021

노키즈존과 스타벅스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 받아들여지는 세상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아이란 다른 연령대의 그 누구보다도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주된 양육을 거의 엄마가 책임지는 사회에서 엄마 또한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이가 떠들면 누구든 그 엄마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둘을 싸잡아 배제할 권력이 있다. 그 정동의 힘에 관해서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내치고 그 엄마를 내친다고 해도 그에 관한 권력의 압박도, 윤리의 압력도, 법의 강제도 없다. ... 왜 '완전한 배제'가 아닌 다른 방법들은 고려되지 않는가? ...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조차 완전히 거부한 채, 왜 가장 손쉽고도 폭력적인 배제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는가? 그 이유는 전 사회적으로, 모든 맥락에서, 그들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정지우






노키즈존 카페가 이렇게 많았어?

가족이 나와 남편 - 성인 두 명 - 으로 이뤄져 있을 때는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데에 사용했다. 주말마다 카페 투어를 하면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커피와 빵을 맛보고, 책을 읽는 것은 우리 부부의 삶에 있는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카페에 갈 때 책이 가득 든 에코백 대신 육아용품이 가득 든 보냉백을 챙기고, 책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하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기에 전과 아이와 함께 카페를 다녔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노키즈존'을 써붙인 카페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전에는 동행에 '키즈'가 없었기 때문에 가고 싶은 카페가 노키즈존인지 아닌지 인지할 필요가 없었던 나의 무심함에 새삼 놀랐다. 아니 그런데, 노키즈존은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어떤 카페는 '노키즈존'을 자랑처럼 대문짝만 하게 붙여놓기도 했고, 어떤 카페는 공간 곳곳에 부모에게 아이를 잘 단속하라는 문구를 협박처럼 도배해두었다.


도대체 어린이라는 존재가 사업장에 어떤 해악을 끼치기에 들어가기 전부터 '오지 마세요.'라고 입장을 거절하는 걸까.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녀 애써 만든 공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에 불편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다가 다치거나 집기가 망가져서? 관리가 어렵기도 하고 다른 손님들이 컴플레인을 해서?


부끄럽게도 아이를 낳기 전엔 "그래, 저렇게까지 써 붙일 수밖에 없는 사업자들의 사정이 있겠지."라며 '노키즈존'의 존재를 소극적으로 옹호했었다. 다만 카페를 이용할 때 위에 언급한 상황들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고, 그런 상황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이이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카페에 머무는 내내 뛰어다니거나 영업에 방해가 될 만큼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더욱이 보통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두고 보지 않는다. 아이와 부모에게 협조 요청을 했는데도 개선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퇴장을 요구하는 게 정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따진다면, 이런 문제는 성인에게도 있다.




강화도 카페 '조양방직'에서



입장까지 막는 건 차별 아닌가요

아니, 사실은 성인들이 더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창조한 '노키즈존'의 존재를 더 납득할 수 없다. 카페에서 큰소리로 얘기해서 다른 손님의 컴플레인을 받거나, 금지된 외부 음식을 가져와서 먹거나, 집기를 깨거나 일부러 훔치기까지 한다.


그런 성인들도 일단 입장은 시켜주면서 아이들은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로 왜 처음부터 거절당해야 하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과 함께 버스도 타지 못할 정도의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사실에는 분노하면서 왜 어린이의 차별에는 이렇게도 관대한가.  


게다가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만큼 '부주의'하지 않다. 성인보다 경험이 적어서 실수를 할 가능성이 더 많을 뿐이고, 키가 작기 때문에 시야가 좁을 뿐이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다치지 않게 조심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알 것이다. 아이들이 넘어질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얼마나 필사적인 움직임을 보이는지. 성인도 여러 이유로 다치는 일이 수두룩한데, 어린이가 그보다 자주 다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어린이의 동행 유무에 따라갈 수 있는 카페가 줄어들었다. 아이가 한 명 생겼을 뿐인데, 카페는 내가 원래 알던 그 카페가 아니었다. 더 이상 나와 남편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벅스에 간다.

 



스타벅스는 왜 노키즈존이 아닐까

스타벅스는 왜 노키즈존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응당 모든 공간은 키즈존이어야 한다. 특정 연령을 배제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힘 없는 다른 조건을 가진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다는 마음은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은가? 누구나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이였고, 그 이후에야 성인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이를 이렇게 차별한다. 어린이가 아니었던 성인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내가 아기를 낳고 보니 스타벅스만큼 가기 좋은 곳도 없었다. 정확히는 모유를 수유하는 엄마가 갈 수 있는 카페는 스타벅스뿐이었다. 매장 입구에 턱이 없어서 유모차를 끌고 들어갈 수 있고, 매장이 넓어서 추레한 모습이 주목받을 일이 없다. 사람이 많아도 줄 서서 기다리는 대신 사이렌 오더로 간편히 주문 후 아기를 돌볼 수 있고, (매우 중요) 수유에 방해가 되지 않을 디카페인 커피가 있으며, 무려 아기의자까지 비치되어 있으니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카페는 사실 상 스타벅스 밖에 없는 셈이다. 게다가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료와 푸드도 준비되어 있다.


누군가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카페 체인이기 때문에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해 줄 수 있고, 여러 리스크에 대처할 수 있는 리소스가 뒷받침이 될 거라고 할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스타벅스가 노키즈존이 될 경우, 득보다 실이 클 것이다. 이 역시도 스타벅스는 대기업에서 운영하기 때문이고, 그간 보여준 포용과 친절한 서비스로 신뢰를 얻은 스타벅스의 이미지를 배신하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스타벅스는 노키즈존인 카페들보다 일일 방문자 수가 훨씬 많고, 노키즈존이 아니기 때문에 '노키즈존이 필요한 이유'로 나열되는 다양한 상황들이 더 많이 발생한다. 유리로 된 수많은 MD들과 망가지기 쉬운 푸드들은 심지어 아이들의 손이 닿는 높이에 진열되어 있다.


그럼에도 스타벅스는 부모에게 아이를 철저히 단속하라고 경고문을 써붙여두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가 있는 가족들에게'도'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나는, 우리 가족은 스타벅스를 좋아한다.




스타벅스 커피와 가제수건의 만남




아이는 경험을 통해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배운다

누군가 노키즈존을 '해결책'이라고 하겠지만, 명백한 차별이다. 모든 가정에서 아이 여럿을 키우던 시절에는 없었던 노키즈존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난 현대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다. 어쩌면 이러한 노키즈존의 등장은 그들이 그런 차별을 원하고 또는 예전의 나처럼 차별을 묵인하며, 그 요구를 아주 손쉽게 해결하려는 몇몇의 게으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차별이며, 이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님은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당하면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또래 친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듯, 아이들과 부모들도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과 부모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카페들을 우리는 감사히 방문한다. '노키즈존'의 세상, 어린이와 부모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또 다른 "어린이가 찾아올까?"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완전한 배제가 아니라, 어린이와 부모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여유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그 여유를 개인이 가질 수 없다면, 국가라도 나서서 만들어야 한다. 저출산 정책은 그렇게 세우는 것이다.



"너희들이 가지 못할 곳은 없어.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어디서나 환대받을 자격이 있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거기서 나와야 하지만, 아예 들어갈 수도 없게 하는 건 저 어른들의 잘못이야."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 김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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