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야’
네 살 아들이 마음이 슬프고 힘들 때 찾는 두 가지는 너덜너덜해질 만큼 만지고 껴안은 애착 인형 ‘토끼’, 그리고 엄마다. 공통점은 아이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무엇이란 것, 그리고 아이가 원할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인형은 말이 없다. 표정도 늘 한결같다. 같이 놀기 싫다며 도망가거나 피곤하다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는 일도 없다. 화도 내지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는다. 감정이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엄마 또한 아이에겐 살아있는 애착 인형에 가까울 것이다. 안고 있으면 안정감을 주는 존재. 기쁠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안겨 울 수 있는 존재.
“너를 안고 있으면 안정감이 와. 나는 너를 안고 있어야 잘 수 있어.”
아들이 애착 인형을 보며 할 법한 이 말은 남편이 나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같이 산 지 10년이 다되어가니 이젠 없으면 허전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나보다. 그는 늘 나를 꼭 안고 잠든다. 불안하거나 마음이 조급해질 땐 더욱 그렇다. 아들이 애착 인형 ‘토끼’를 찾듯, 남편은 나를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다. 내가 ‘안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 때도 그는 나를 안고 자려하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잡고 잠에 드는 사람.
혹여 거절이라도 하게 되면, 거절한 사람과 거절당한 사람 모두 조금 속상해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은 사람처럼, 가끔은 인형처럼 반응하게 된다.
부부 사이가 늘 좋을 수만은 없다지만 내 기분이 어떤지 헤아려주길 바라는 건 사치일까? 어쩌면 남편도 알고 있지만, 피곤하고 늦은 밤 유쾌할 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을 것이다. 쓴 뿌리를 마주하기 싫어 포옹으로 무마하거나 회피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서로 사랑하려고 함께 사는 거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버릴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눈에 별 것 아닌 것에도 마음이 상하는 것도 나, 사이가 좋을 땐 너만큼이나 나 또한 꼭 안아주고 싶은 것도 나인 걸. 그게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