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 놀이를 하며 깨달은 것
어느덧 6살이 된 아이는 블록을 가지고 전차나 무기를 만든다. 작품의 용도에 맞게 휘두르며 갖고 놀다 보면 이음새가 약해져 금세 부서지고 만다. 블록은 이을 수 있기에 분리될 수도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아이에겐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불과 1년 전만 해도 아이는 블록이 부서지면 집이 떠나가라 "똑같이 만들어 줘!" 하며 울고불고 짜증을 냈다.
"최대한 똑같이 만드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똑같지 않을 수 있어. 그 대신 더 멋진 걸 만들어 볼게."
좌절과 혼란 속에서 아이를 구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마치 블록이 흩어져있던 시절을 몰랐던 것처럼 '똑같이!'무새가 되어 울기만 했다. '블록은 원래 이런 거야!'라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아이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가끔은 울어대는 아이를 참지 못해서 "부서지는 게 당연한 블록이 부서진다고 화낼 거면 앞으로 갖고 놀지 마!"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우리의 대응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이가 블록을 가지고 노는 매일, 블록이 부서지는 매 순간마다, 나와 남편은 똑같이무새 아이가 어떻게든 다시 만들어볼 수 있게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는 결국 울면서 똑같이 만들어내기도 하고, 만들다가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뭔가를 만들기도 했다. 똑같이 만들면 그대로 재현한 것을 칭찬했고, 새로운 걸 만들면 우리는 잊지 않고 이렇게 칭찬을 해주었다.
"부서져서 아쉽지만, 그 대신 더 멋진 걸 만들어냈네!"
지금도 블록으로 만든 작품이 부서지면 "전에 그랬듯이, 네가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아이를 달래고 독려한다. 부서졌다고 세상이 끝난 건 아니라고. 부서진 건 '새로운 걸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니까 이런 긍정회로는 아이를 키우기 전의 내 뇌에는 없던 길이다. 회의주의자, 그건 나를 설명하는 말 중 하나였으니까. 엄마 이전의 나는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매번 분노하고, 그러다가 '굳이 계속 살아야 하나?'라는 존재의 이유까지 되물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내가 아이를 도와주려고 억지로라도 긍정회로를 돌리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내 삶에서도 애써 쌓아 올린 게 무너졌을 때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매번 그 길로 가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가볼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 육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 뿐'이라는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닌데 아이 앞에선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그렇게 애쓰려다 보니 육아가 힘든 건 아닐까 하고. 내 모습대로 막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육아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양육자는 제 본성이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에게만큼은 긍정적인 말과 행동, 격려를 해야 한다. 내 안에 그런 말이 없다면, 육아서를 잔뜩 사다가 그 말을 찾아서라도 제 입으로 뱉어야 한다.
부서진 블록 앞의 좌절한 아이에게 다시 해보자고,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다고,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억지로 이렇게라도 긍정의 말을 연습하며, 나라는 인간도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깨달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나아지고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블록 놀이를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