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내가 게으른 게 아니었다고

스스로 의심하던 나를 믿게 해 준, 기록에 대하여

by 별밤

기분과 실제는 다르다

12월 31일, 한 해를 회고하는 시간. 모닝페이지와 캘린더, 다이어리 등의 다양한 기록을 살피며 1년의 월간 주요 이벤트들을 나열하고 보니 '새삼 많은 일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내가 그걸 해냈구나' 하고, 놀랐다. 일상에서 인식하는 '나'는 무력하고 게으른데, 1년을 펼쳐서 보니 마냥 게으르다고 하기엔 해낸 일이 많았다.


2024년은 도전을 많이 했던 한 해였다. 나에게 도전은 '완벽히 준비되지 않아도 일단 해보는 것'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다가온 기회에 최선을 다한 때도 있었고, 하기 싫었지만 과거의 내가 벌인 일 혹은 현재 역할에 따른 책임감에 힘겹게 해낸 것도 있었다.


부족해도 하기로 했으니까, 더 준비하고 공부했다. 잘하는 것만 하려고 했다면 절대 얻지 못했을 성취감도 얻었다. 또 다른 기회가 열렸고, 좁은 줄도 몰랐던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동시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는 멈춰야 하는지도 배웠다. 이 모든 것은 해봤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회고를 하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기분'과 '실제'의 나는 완전히 같지 않다는 걸, 쌓아온 기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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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하루를 덜 미워하는 방법

우울증의 증상으로 무기력을 심하게 앓았었다. 종일 중력과 싸우고, 밤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싸우느라 늦게 잠드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약을 먹고 있다 해도 자괴감은 약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어서, 안개같이 일상에 깔린 무기력으로 인한 자괴감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주 별 거라도 내가 한 일 써보기'였다. to-do list 말고 done list.


거의 매일같이 사수하던 모닝페이지 따위도 쓸 수 없을 때였고, 기껏 사둔 점심도 안 먹을 정도였으니까 밥 먹는 것도, 샤워한 것도 '오늘 한 일'에 포함시켰다. 뭔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땐, 작은 거라도 써보고 눈으로 그걸 보면 조금은 덜 자책하게 된다. 때론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게 전부인 하루였어도. 눈으로 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다.


이런 식의 기록은 스스로에 대해 품는 인식을 조금씩 바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느꼈던 날조차, 실제로는 '한 일'이 존재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나는 그날의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6FEC39A4-4642-490B-999C-4CD4E2DFDC7F_1_105_c.jpeg 2023년 어느 날의 done list



스스로를 인정하기까지

매일의 감각으로는 게으른듯한 무기력한 '기분'이 마치 진짜의 나처럼 보였다. 하지만 쌓인 기록들은 내가 스스로를 올바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전히 '게으른 나'라는 음침한 굴레에 빠져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과 실제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걸 안다. 그 사이를 이어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귀찮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기록과 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을 때의 유익은 지난한 과정에 비할 바가 아니다.


회고를 마치며 나 스스로에게 '무기력하다'거나 '게으르다'는 부정적인 인식은 조금 거두고,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힘들어도 매일을 버텨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다시 한 해를 회고하게 될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 사이에 나는 또 얼마나 자랐을까, 어떻게 달라졌을까.



114CE86F-7C04-484C-9E75-60B91D728072_1_105_c.jpeg 내 삶의 데이터들스스로 의심하던 나를 믿게 해 준,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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