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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Sep 11. 2023

1억 소비의 현실적 환상에 대한 변

<별숲 에세이>

  일요일 저녁 아이는 일찍 잠들고 남편은 영화 한 편 보고 잔다며 맥주 한 캔을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 다 충실했던 주말 휴일이었다. 아이와 탄도항의 석양도 바라봤고, 강아지까지 데리고 나가 맛있는 파스타도 먹었다. 시원한 집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난 10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니까 아이가 즐겁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싶다.


 금요일 도서관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치한 프리미엄아웃렛을 들렸다. 재택근무 중 시간을 내어 영종도까지 기사 노릇을 해준 남편의 골프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결국 남편은 마음에 드는 신발을 찾지 못했고 난 내 워킹화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키즈 하이탑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무난하고 세련된 것이 해마다 발이 커져서 신발을 자주 사야 하는 아들에게 딱이었다. 순간 고민이 들었다. '내 거랑 아들 거 둘 다 살까? 그럼 지출이 예상보다 커지는데...' 매장을 나오면서 남편이 한마디 건넸다. "결국 넌 아들 거만 산다니까~" 둘 다 아니 우리 세 명을 위한 물건을 다 사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고정된 수입 하에 앞으로까지 대비하며 소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나는 이럴 때면 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 밤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단 하루동안 나를 위해 1억을 쓴다면'이라는 글감을 받은 후로 일주일 내내 내 머릿속은 온통 1억 뿐이었다. '아... 내일 쓸까?' 고민하다가 일단 글은 올리고 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2000자 에세이를 쓰면서 어떠한 초고작성의 과정 없이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며 밴드 게시판 창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1억의 소비, 1억의 의미, 1억의 가치, 1억 원어치의 모든 것들을 말이다. 여간해선 2~3일 내에 대략의 초안이 잡히는데 1억의 소비는 실로 억 소리 나게 나를 힘들게 했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은 상상 중 하나는 로또 1등에 당첨됐을 때 어떤 일에 돈을 쓸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당첨금에 대해 나와 남편은 나른한 일요일 오후 커피를 마시면서 굉장히 디테일하고 진지하게 각자의 계획을 떠들곤 한다. 마치 영영 결제버튼을 클릭을 하지 않겠지만 괜스레 담아놓고 언젠간이라는 희망고문에 가득 찬 장바구니 속 잡동사니 오브제를 늘어놓는 기분이다. 헛소리에 가까운 망상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꿈에서 가끔 돼지가 나오거나 똥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동네에서 가장 핫한 복권 판매점에 가서 자동으로 복권 10장을 샀다. 물론 항상 꽝이었지만 숫자를 맞출 때면 그마저도 언제나 혼자 숨어서 확인하는 응큼함을 가진 나다.


 이런 나에게 하루에 1억을 쓸 상상을 해보라니.. 난 이미 살짝 녹슬기 시작한 그래도 깨끗한 무명천으로 정성껏 닦아만 주면 금세 윤기를 내며 진가를 발휘하는 40년 넘은 방짜유기 같은 나이이지 않는가. 이런 진부하고 순진한 상상을 하란 것은 내가 속까지 깨끗이 비치는 유리잔 같은 나이일 때나 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1억 소비에 대한 재치하고 기발하고 또는 감동적인 상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난 현실의 상상을 택하는 것이 현재의 정신건강에 더 좋지 않을까 결론지었다.  이래도 저래도 만약이라는 상상의 전제가 있다 해도 현실적 상상의 기분 좋음을 택하겠다는 말이다. 그저 1억을 반드시 하루동안에 다 써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어쨌든 난 하루종일 금리가 제일 높은 좋은 상품을 골라 1억을 예치한 후 이자를 받으며 후일을 도모해볼까 한다. 너무 안정 지향일지라도 인생에서 1억을 모으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 상상이 곧 현실적 설계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슬쩍 믿을만한 금융권의 예금적금 상품들의 이율을 확인해 본다. 영 짠 것이 씁쓸한 일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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