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히는 불안, 내 아이를 힘들게 하는 불안]
조롱조롱 책가방 신발주머니를 업고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아른하다. 교실까지 함께 가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코로나 때였다. 유치원이야 등원버스부터 선생님이 계시니 무슨 걱정이겠냐만은 갓 초등학생이 된 형아는 씩씩하게 혼자 교실을 찾아 걸어 들어가야 했다. 함께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엄마들은 삼삼오오 교문 앞에서 각자 나의 아이를 바라봤다. 친정 엄마가 사준 기다란 패딩점퍼는 오래오래 입으라는 할머니의 마음처럼 아들에게 너무도 길었다. 푹신한 패딩, 커다란 가방에 묻힌 채 걸어가는 모습이 영 미덥지 못하면서도 어느새 피어버린 꽃처럼 소중했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아들이 잘 들어가고 있다고... 너무 기특하고 눈물 난다고... “우리 때는 몇십 분씩 혼자 걸어서 학교 다녔잖아, 단지 코앞에 있는 학교도 데려다주냐.” 반응은 시큰둥했고 극성엄마가 됐다. “나만 그런 거 아니야! 다들 그래!” 바로 응수해 줬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지려는지, 나는 종종 웹 지도를 이용해 예전 초등학교 등굣길을 따라가 보곤 한다. 지금은 조원동으로 바뀐 기억 속의 이름조차 사라진 신림8동... 그곳은 나의 유년이었다. 복도식 낡은 아파트는 자리를 지켰고,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커다랬던 수양버들 나무는 사라졌다. 내가 걸었던 학교 가는 길을 차곡차곡 따라가 본다. 골목은 그대로였고 친구 손에 이끌려 딱 두 번 갔었던 삼거리 교회는 광을 낸 듯 번쩍거린다. 거리를 재보니 집에서 학교까지 1.5km 남짓, 어른 걸음이면 20분 정도면 충분했겠지만 8살 초등학교 1학년은 족히 30분은 걸렸을 터이다. 엄마는 그 긴 거리를 딱 한 번 함께 걸어가 주고 다음날부터는 홀로 등교하게 했다. 내가 빨리 스스로 하는 아이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베이비붐의 끝자락 세대의 학교 가는 길은 언제나 북적였다. 비닐 끈 자국으로 손바닥이 새빨개질 정도로 무거웠던 신문지 폐품도 거뜬히 들고 오갔던 그 길. 우리는 씩씩했다.
막 초등 1학년된 아들은 하교 후 같은 반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놀이터에 모여 삼사십 분 정도 놀이 시간을 자주 가지곤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가져온 포켓몬 카드를 서로 보여주기도 하고, 축구공을 차기도 하고, 얼음 땡 같은 잡기 놀이도 알차게 했다. 아들이 학교 가는 것보다 방과 후 친구들이랑 뭘 할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아이들은 유독 숨바꼭질 놀이는 하지 않았다. 숨바꼭질은 세계 곳곳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며 존재할 정도로 흔한 놀이지만 우리 동네는 여간해서는 그 놀이를 즐기지 않았다. 이제 숨바꼭질하면 떠오르는 건 공포영화의 한 장면뿐, 추억의 놀이는 스스로 숨바꼭질하듯 꽁꽁 숨어 버렸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한번 모이면 많게는 예닐곱 명 정도였다. 한데 모여 놀기도 했지만 대개 둘셋씩 나누어져 공놀이를 하거나 개미굴을 쫓아다니면서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인가 아이들이 각자의 놀이에 빠져있을 때, 한 엄마가 급하게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들끼리 수다에 잠시 빠져있을 때,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이유였다. 아파트 단지 안, 넓은 놀이터에서 아이가 사라졌다. 나를 포함한 다른 엄마들도 덜컥 놀라 일제히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드디어 그 아이를 발견했다. 놀이터 계단 밑에 있는 화단에서 커다란 나뭇가지를 찾느라고 정신이 팔려있었나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들은 단지 위쪽 끝 다른 놀이터까지 아이를 찾아다녔다. 사실 아이는 10m 근방 안에서 홀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엄마는 야속한 마음에 아들의 등을 두드렸지만 정작 본인은 해맑았다. 드디어 제일 큰 멋진 나뭇가지를 발견했다고, 내가 대장이라면서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놀란 엄마의 속은 알 바 아니었다. 다신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의 말을 몇 번이나 들은 후에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친구가 저렇게 사라진 것은 관심 없었고, 온 관심은 친구가 발견한 큰 나뭇가지에 쏠려있었다.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나뭇가지를 찾겠다고 이리저리 흩어지려는 것을 엄마들이 그만하자고 만류했고 그렇게 흐지부지 그날의 사건은 마무리됐다.
순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떠오른다. 어른들이 표현으로 ‘잠시 사라졌던’, 본인의 표현으로 ‘멋진 대장 나뭇가지를 찾아 탐험했던’ 그 아이가 왠지 삐삐 같았다. 엄마들의 성화는 들리지 않고 오직 크고 멋진 나뭇가지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아이들을 삐삐 옆의 토미와 아니카라고 상상했다. 값비싼 진주로 구슬치기 하는 삐삐에게 나뭇가지와 진주의 가치는 별 차이가 없다. 동심을 지키는 놀이의 장난감일 뿐. 아이들은 스스로 신나게 놀 수 있는 존재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그 본능적 가치를 알고 있을까. 아니, 이미 가지고 있지만 그저 놀이를 주저하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세상이 험해졌다고 한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CCTV가 곳곳에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 안에서조차 아이가 사라지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이유이다. 간간히 내가 사는 동네에 거주하는 성범죄자 신상을 공지하는 우편물이 오곤 한다. 우린 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불안해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한국의 치안은 세계 최고라지만 자부하지만 동시에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꽁꽁 싸매는 불안도 세계 최고가 되었다. 아니, 우리는 묻어가고 싶은 비겁한 나의 표현일 뿐, 내가 아이를 내놓지 못했다. 난 본래 불안이 강한 아이였다. 엄마가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항상 조심스럽고 착한 아이였다. 불안은 너무 소중해 손아귀에 꽉 쥐었다가 금세 녹아버려 엉망이 된 초콜릿의 색이었다. 엄마를 향한 사랑은 우리 사이를 끈적거리고 새카맣게 만들어버리는 애증이었다. 그 허함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이제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정도로 조그마해진 것도 사실이다. 복잡한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앞 거리를 걸을 때 손에 땀이 나도록 엄마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줬을지... 불그레해야 할 손톱의 반이 핏기 없는 하얀색이었다. 엄마는 한 번도 나의 강한 손아귀를 뿌리친 적 없다. 뭐라 한 마디 한 것도 없다. 그래도 알고 있었겠지? 무뚝뚝하고 삶이 고단했던 엄마가 그나마 나를 헤아려준 정성은 긴장 속에 서로의 열기를 느끼며 맞잡고 있던 손과 손 사이에 있었다. 불안은 불안을 낳는다. '나의 이 불안을 내 아이도 느끼고 있겠지...' '나 때문에 아이도 없던 겁이 덜컥 생겨버린 것일까...' 어른이 된 나는 커버린 몸집만큼 다시 한번 용기를 잃었다.
ㄱ자로 꺾인 채 놀이터를 품고 있던 나의 복도식 미성아파트는 안전기지였다. 아무리 겁쟁이였을지라도 그 안에서는 안전했고 자유로웠다. 꼬마 때부터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놀고 있으면 엄마가 아파트 복도에서 그만 들어오라고 크게 소리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온갖 흙장난, 풀 장난에 얼굴이 시꺼메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를 떠올리며 지금 내 아들이 너무 멀끔한 것이 아닌가 머쓱한 기분이 든다. 언제나 물티슈, 물통, 소독제, 젤리 같은 간식을 가방에 넣고 아이가 노는 것을 지켜봤다. 엄마 없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엄마 어디 계시니?" 하고 되레 묻기도 했다. 아이들은 꽁꽁 갇힌 채 놀이한다. 자유로웠던 우리들은 부모가 되고 겁쟁이가 돼버렸나. 아니, 내가 겁쟁이 본능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부모와 아이는 서로를 먹이고 섭취한다. 주머니 안에 숨겨놨던 나의 불안이 다시 내 아들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12살이 된 아들이 오히려 나를 먹여준다. 아들의 커다란 맑음이 나의 작고 뾰족한 걱정을 무디게 만든다. 이제 더 이상 즐거운 숨바꼭질을 맘껏 할 수 없는 내가 스스로 좁힌 세상. 그 안에서 난 일부러 흙을 찾아 숲 체험을 따로 하고, 숲 유치원과 숲 캠프를 예약했다. 이리저리 뛰놀던 미로 같던 골목은 으슥한 우범지대의 표상으로 변했다 한탄하면서도 놀이의 변화가 이리도 아쉬운 것은 그만큼 내 유년의 놀이에 몰입했던 즐거움이 컸던 탓일 것이다.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엄마가 불러도 못 들을 정도로 노는 시간이 과연 내 아들에게 충분했을까? 안전이 보장된 키즈카페에서 노는 것이 익숙한 내 아들. 이 시대 아이들의 숨바꼭질은 어떤 놀이가 되어야 할까. 아이들은 여전히 스스로 나뭇가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엄마를 안아준다. 마치 린드그렌의 삐삐가 “말도 안 돼,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 있는데 왜 춥겠니”라고 했듯 위로가 된다. 숨어버린 숨바꼭질은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허락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손바닥 안 불안과 두려움, 그것을 풀어낼 해소의 필요. 실로 나를 찌르는 정곡이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온몸을 감싼 채 살아가는 메두사는 엄마가 된다. 너무나 소중한 엘리제는 그때부터 메두사의 작은 진주가 된다. 행여 다칠까 상처받을까 자신을 감쌌던 머리카락으로 이제 딸은 안는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한다. 엄마가 바라보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아이의 시선은 바깥을 향하고 있다. 메두사는 아이를 온전히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상처받은 엄마의 그림자가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 키티 크라우더는 딸 엘리제를 키우며 동시에 성장하는 메두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엘리제의 두건이 활짝 벗겨지는 순간, 메두사 역시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해방되는 날이 된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점 울타리 같은 부모를 원한다. 울타리 안,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음껏 보며 만지며 세상을 향한 기지개를 준비한다. 그리고 결국엔 그마저도 뛰어넘게 된다. 세상은 걱정과 염려로 얼룩진 부모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험악한 꼴로 왜곡되지만 아이의 호기심은 이길 수가 없다. 아이의 독립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 손가락 한 마디 꼭 붙잡았던 그 야무진 히마리를 추억하며 더욱 큰 힘을 보태주자.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쉬어가라고... 배고프면 언제든 연락해 따뜻한 밥 한 숟가락 먹고 가라고... 그렇게 부모의 커다란 손은 나의 아이에게 언제든 내밀고 있다.
한 고양이가 세상을 창문을 통해 배운다. 고양이의 세상은 아직 좁다. 고양이는 고양이 모양의 집에서 세상을 꿈꾼다. 생쥐를 알아, 저것도 털이 숭숭 생쥐겠구나! 하지만 그것은 다람쥐이다. 고양이는 이처럼 나만의 집 창문 모양을 기준으로 바깥세상을 가늠한다. 호언장담하며 당당하게 꼬리를 치켜세운 채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간다. 고양이가 직접 세상을 처음 만나는 순간, 당황하며 내뱉는 그 한 마디를 꼭 기억하자. 비단 고양이 뿐이겠는가,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