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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별연두 Mar 27. 2019

끼 부리는 녀자

나를 찾는 여행이 시작되다


그렇다. 나는 ‘끼 부리는 여자’  되고 싶다.

Photo by Andre Furtado @ Unsplash

여기서 잠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끼’란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나오는 1번 의미의 것이다. 2번이 아니다.


명사

1.기본의미 남달리 두드러지는 성향이나 성격.

예) 끼를 발휘하다

2.주로 남녀 관계에서, 복잡한 이성 관계(異性關係)를 가지거나 그 상대를 자주 바꾸는 기질.

예) 그는 끼가 다분하여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현재 나의 끼는 마음의 바다 수심 1000m 아래쯤에 쏙 숨어 있다. 겉으로 두드러지는 성향은 없다. 남들이 보기에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나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남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다. 객관적으로는 튀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들 고만고만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개개인에게는 각자 가지고 있는 개성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 보석(=개성)을 채굴해서 세공까지 하는 것엔 인색하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을지언정, 현실적으로 먹고살기도 바쁘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만의 감성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거나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뱉어 냈다. 종종 미술 학원에서 튀는 행동을 했다. 한 번은 선생님께 ‘오늘은 제 마음대로 그려도 될까요?’라며, 물을 쓰지 않고 수채화 물감 튜브를 바로 도화지 위에 짜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학교 미술시간도 자유 주제일 때 제일 눈을 반짝였다. 음악시간엔 나만의 애환(?)을 담아 연주하다 원곡의 감성을 역행하기도 했다. 반에서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친구와도 곧잘 같이 다녔다. 스스로 데이기 전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초등학생 시절의 신념이었다. 재능이 있거나 똑똑하거나 등등의 긍정적인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Photo by pan xiaozhen @ Unsplash

중학생이 되면서 머리가 굵어지자 남들의 시선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있다면, 내 생각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시험문제는 생각을 배제한 채 상식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되었다. -특히, 국어 시험에서 주인공이 느꼈을 감정은? 과 같은 문제 - 그 이후 나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나란 사람은 자유롭고 센치하며 고집이 세지만 최대한 이런 부분을 감추었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해 나 또한 옳다고 사고하는 트레이닝을 남몰래 했다. 그것이 남들과 지내기 편했다.


그러다가도 종종 마음속 내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때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반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맡았다. 연습 땐 -음악 교과서에 그려진 대로- 매번 기계처럼 팔을 4분의 4박자에 맞추어 휘둘렀다. 마음대로 휘둘렀다간 자칫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합창대회 당일 교단에 오르자 스피커에서 나오는 친구들의 노랫소리와 피아노 반주가 몸통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늘씬한 은색 지휘봉과 한 몸이 되어 우아한 새처럼 춤을 추었다. -참고로 이날 우리 반은 중간에 박자를 놓치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우린 실수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고 동상을 탔다- 그 순간 본연의‘내’가 잠시 흘러나왔다. 이후 전과 같은 일상이 시작되자 또다시 나를 숨겼다.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날-나도 모르게 내가 흘러나오는 그런 날-조차 거의 없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나를 숨기는 법에 익숙해졌고 이젠 나를 꺼내는 방법을 모른다. 정말 모르겠다. 11살 나의 꿈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이의 꿈은 대체로 허황되고 자주 바뀐다. 하지만 그 땐, 바이올린을 켜는 시간이 영혼을 어루만져 준다고 느꼈고 무엇보다 소중했다. 재능이 없어도... 그저 그런 음악가가 되더라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중학생이 되자 장래희망은 의무적으로 ‘의사’가 되었다. 때론 ‘판/검사’ 혹은 ‘교수’였다. 내 마음이 아닌 부모님의 바람에서 꿈을 조정했다. 바이올린은 중학생이 되자마자 그만두었다. 그 정도 성적이면 바이올리니스트보다는 현실적으로 좀 더 꿈을 크게 갖는 것이 좋겠다는 어른들의 결론이었다. 뭔가 억울했지만 합리적인 판단인 것 같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안 좋은 일 시키겠니?’라는 말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Photo by Zack Minor @ Unsplash

남동생은 나를 싫어했다. 사춘기의 동생은-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부모님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드러머가 되겠다며 부모님 속을 초 단위로 썩였다. 그런 동생은 종종 나에게 “너는 독해. 그렇게 독한 게 이해가 안 돼. 목표도 없이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열심히 하지 마. 공부하기 싫을 땐 좀 놀아. 너 하고 싶은 대로 좀 해봐. 하여튼 넌 이해가 안 돼"라며 짜증도 많이 냈다.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동생에게 “너처럼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야. 넌 무책임한 거라고”라며 맞받아쳤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쳐 찾는 사람은 동생이었다.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자유로움이 익숙한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날이 많았다. 우린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외로운 하루하루 속에 서로를 의지했다. 나는 나를 숨길수록 그는 그를 드러낼수록 외로웠다.


33살의 난 꿈이 없었다. 내 아이를 위해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싶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동기가 되진 않았다. 그것이 삶을 열심히 살아야할 원동력이 되진 않았다. 30여년간 서서히 내 본질을 잃어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베프였던 기즈키를 잃고 어찌할 수 없는 상실감에 묶여버린다. 난 나를 잃어버리고 가슴 정중앙이 뚫린채 방황하고 있었다.


33살, 방황의 벼랑끝에서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나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몸부림을 치는 도중에 동생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동생은 통화 말미에 한마디를 남겼다.

Photo by Clark Tibbs @ Unsplash

“누나 잘 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도전해보는거야. 앞으로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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