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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Jun 19. 2024

'아무것도 안된다'고 말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결과 지상주의, 성과주의로 치장된 맹목적인 한 마디

'아무것도 안된다.'


 가만히 곱씹어 볼수록, 텅 비어있는 말입니다. 상당히 공허합니다.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은 완결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아마 직접 들어본 적은 없어도 상당히 익숙하다고 느끼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짙은 농도의 기시감旣視感을 가지고 있는 이 문장이 담고 있는 허무감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 말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인터넷 게시글의 댓글이었습니다. 해당 게시글의 작성자는 어떤 논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는 사안이었기에 저는 나름 논리적으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역시 글에는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유독 격양되어 보이는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댓글의 작성자는 게시글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었고, 해당 사안에 대해 깊게 이입하는 동시에 피로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댓글 작성자가 글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로감을 쏟아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비판하면 아무것도 안되지요!”


 저는 게시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댓글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글은 나름대로 논거를 들어 '어떤’ 생각을 펼쳤고, 이에 따라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자는 거구나’하는 내용까지 끄집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것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 '무언가가 되는' 주장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을 문법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이 문장은 한 개의 목적어와 한 개의 서술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으니 생략된 주어를 대명사로 추가한다면 본래 문장은 '그것은 아무것도 안된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주어인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存在 하는 것’입니다. 일단 주어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목적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어인 '아무것'은 관형사 '아무'와 의존명사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의미 값을 가지는 것은 관형사 '아무'입니다. '아무'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관형사)

1. 어떤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를 때 쓰는 말

2. ((주로 뒤에 오는 '않다, '없다', '못 하다'따위의 부정적인 말과 함께 쓰여)) '전혀 어떠한'의 뜻을 나타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아무것도 안된다'를 구성하는 '아무'는 부정적인 말(‘안된다’)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전혀 어떠한’을 뜻하는 두 번째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 등장하는 '아무것'은 '특정되지 않은 무언가'가 아니라 '어떠한 것도 아닌'입니다. 부정 관형사와 부정 부사('안’)가 함께 쓰이면서 문장의 의미는 텅 비어버립니다.


 나아가 생략된 주어와 함께 보면 이 문장은 그저 의미가 비어있는 것을 넘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말임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생략된 주어가 '그것은'이라고 가정했습니다. 주어를 '그것'이라고 설정한 이유는 말하는 이가 지시하는 분명한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지시된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이 발화되었고, 그래야만 소통상황에서 문장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장의 심각한 논리적 모순이 등장합니다. 앞선 설명을 종합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은 '그것'으로 지시된 존재存在가 '아무것'이라고 표현된 비존재非存在로 전락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존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도 비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존재가 되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 합니다. 혹시 어떠한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상 유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무것도 안된다'라고 말하기보다 '변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은 '아무' 내용도 없고, 심지어는 성립조차 불가능한 말입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이 나올법한 논쟁적 상황에서는 특히 더 논리와 체계를 갖추어 말하는데 집중합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논의를 충분히 쫓아가지 못할 때 황급히 주장을 부정하기 위하여 반사적으로 내뱉는 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상대의 말이 마음에 안 들어 반박은 하고 싶으나 그것이 부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벅찰 때 입 밖에 내던지듯이 하는 말이라는 것이죠. 논리적 발화가 이어지는 대화 현장에 감정적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자기 생각(이라고 여겨지지만 이미 감정이 되어버린 무엇)을 지키지 위해 세우는 일종의 방어벽입니다.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은 결국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반영합니다. '아무것도 안된다'가 감정적으로 튀어나오며 반박의 만능열쇠처럼 쓰인다는 것은 일단 이 말이 무조건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는 우리 문화가 '결과가 있어야만 옳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과 지상주의와 더불어 성과주의가 팽배합니다.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이 말이 자주 쓰인다는 것입니다. 종종 교육자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 그렇게 해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돼. 대체 뭐 되려고 그러니?”


 정말 무책임한 발화입니다. 그걸 가르치기 위해 교육이 있는 것 아닌가요? 대상이 무언가가 되지 못할 것 같다면, 무엇이 될지는 말하는 이가 제시해야 합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안된다'는 이론적 논의보다 실용적 논의에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박과 함께 대안 제시가 필수적입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상대에 대한 폄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입에서 '아무것도 안된다'는 말이 나올 것 같다면, 대화를 잠시 멈추는 것을 권합니다. 이미 당신은 이 주제에 대해 말할 기운이 없고, 감정적으로는 쾌적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대화가 힘든 상황에 와 있습니다. 끝내 '아무것도 안된다'고 말하게 된다면, 그저 논의에서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기 불가능한 상황임을 고백하는 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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