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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Aug 26. 2021

자기 찾기를 위한 자기 찾기

신채은 쇼케이스: 《엎질러진 몸》

 

《엎질러진 몸》 중


 '엎질러졌다'는 말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미 '엎질러진 것'에 대해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수습은 고사하고 일단 그대로 두고,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엎질러졌다'는 말이 강압적으로 제안하는 '무기력' 위에서 무용가 신채은 님은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그리고 '엎질러졌다!'고 소리칩니다. 어느 것 하나 주워 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몸'을 샅샅이 '조명'합니다. 무용가 신채은 님은 손전등을 들고 몸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마치 '무기력'의 멱살을 잡고 흩어지는 시선을 주저앉혀 '엎질러진 몸을 똑똑히 보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은 이미 엎질러져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쉬지 않고 매일 매 순간 엎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엎질러진 몸'. 우리가 사력을 다해 '주워 담으려고 노력하는' 그 몸.

 


 

 '엎질러진 몸'을 보며, '엎질러진 몸'을 주워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산산이 실패해 버린 제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20살까지 열렬한 운동광이었습니다. 무도 자격증과 각종 운동 경력으로 공부가 길이 아니라면 운동선수를 고민했을 만큼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21살 때 몸이 거하게 '엎질러집니다.' 군대에서 큰 병을 얻어, 심장에 두 개의 기계판막을 달게 된 후 어떤 운동도 전처럼 할 수 없었고, 전처럼 해서는 안 되는 몸이 되었습니다. 


 '엎질러진 몸'을 '주워 담으려는' 피가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노력은 저를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완전한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욕심내는 순간, '엎질러진 몸'은 제 기대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습니다. 전신의 내출혈, 구현되지 않는 자세, 돌아오지 않는 실력... 저에게 '엎질러졌다'고 말하며 '무기력'하게 있으라고 명령하는 벽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엎질러진 몸》 중


 '엎질러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몸은 철저하게 '엎질러졌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윽박지릅니다. 몸에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가혹한 굴레에서 발버둥 치다가, 시간을 낭비하며 '무기력'한 시간이 '무기력'하게 쌓입니다. 


 우리의 몸에도 시간이 남습니다. 몸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구석구석에 남기고 여러 모양으로 닮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몸에 남은 시간 중 어떤 것은, 보기 싫다며 '흉'한 '터'라고 이름 붙였지만, 엄연히 남은 것은 남은 것입니다. 제 가슴에 남은 23cm 어치의 수술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차라리 이런 것에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습니다. 나무가 가진 나이테라는 이름을 빌려오지 않는다면, '시간흔'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 앞에 우리가 '무기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흔'이든 '노화'든 몸에 '시간이 쌓이는 것'의 운명적인 굴레에 우리에 '무기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간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마저 몸에 시간이 쌓이는 것처럼 운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간흔'이든 '노화'든 거부하려고 할 때, 시간은 더 가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귀퉁이에 우리를 족쇄로 매달아 버립니다.


 무용가 신채은 님은 아예 그 운명적인 시간 앞의 '무기력'을 무대 삼았습니다. '엎질러졌'기 때문에 어찌할 방법이 없다면, 그 위에서 춤추겠다고 말합니다. 영상과 춤으로 20여 년의 자기 서사를 보여줍니다. '무기력'하게 쌓여버린 시간. 그 '무기력'에 눈 감지 않고 온'몸'으로 무대가 되는 순간, '무기력'은 오히려 자기 이해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써야 할 책은 마땅히 '자서전'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엎질러진 시간'이 쌓인 '엎질러진 몸'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표현할 수 있겠냐고 말합니다. '엎질러진 몸'에 대해 알아야 '엎질러질 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갈 '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려온 '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파고들어 절규하지 아니하고 과거를 무대 삼아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몸을 트는 춤추는 것. 이것이 무용가 신채은 님이 '무기력'한 '엎질러짐'을 온전히 이해하여 무대 삼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엎질러진 몸》 중 김채은 님의 드로잉 퍼포먼스


 나아가 무용가 신채은 님은 '엎질러진 몸'을 통해, 우리에게 '엎질러진 시간 위에서 앞으로 엎질러질 시간을 이야기하자'고 말합니다. 춤을 추는 무대 한쪽에서, 도화지를 무대 삼아 춤추듯 그려지는 드로잉(퍼포먼스 김채은 님). 지금까지 그려진 시간을 지나, 이젠 춤을 통해 그려질 시간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을 찾았지만, 함부로 자신을 쌓인 시간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쌓인 시간 위에서 춤춘 것은 새로 추어질 춤으로 나아가는 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추어질 춤도,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고 긴 춤의 한 꼭지일 것입니다.




 몸은 엎질러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걸 몰랐다고 하더라도, 시간 안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엎질러져 있었습니다. 나아가기 위해선 '엎질러진 몸'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정'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거부해 온 '몸' 혹은 '몸의 시간'과 '화해'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적지 않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엎질러진 몸'을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가 과거에 족쇄 채워지지 않고 온전히 '내던지며 나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엎질러진 몸'을 알고 그 몸과 함께 앞으로 '내던지는 것'은 '시간에 의한 엎질러짐'이 선사하는 '무기력'을 넘어 스스로 엎질러지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몸'에 대해 회한을 가지지 않되, 잊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의 제가 그러지 못하고 철저히 좌절했던 반면, 현재의 무용가 신채은 님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엎질러진 몸》 중


/춤: 신채은

/드로잉: 김채은

/영상: 이상범

/사운드 및 디자인: 이상이

/연출 및 영상보조: 김관지

/장소 후원: 누벨당스

/사진출처: 신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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