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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Oct 09. 2021

마음이 예쁜 사람은 물도 좋고 산도 좋대요.

미세기 화실 오픈스튜디오《금화교역金火交易》

智者藥水 仁者藥山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뜯어보면, 물과 땅(산)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智慧롭다'는 것은 '이해理解한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해'는 대상이 가진 모습이나 의미 등을 알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강제하지 않고, 억지로 거스르거나 뒤틀고 바꾸어 강요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것은 그것의 원형原形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에 '지혜로운 이'는 크고 작은 '자연自硏스러움'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대상을 바꾸지 않고 자연스러운 그것을 존중하면서 원리와 흐름 속에서 변화를 관망합니다. 물이 그렇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큰 원리를 이해하면서 대상과 마주치면 대상의 모양을 따라 방향을 틀고, 고이기도 하며 수많은 모습으로 상대를 존중합니다. 힘으로 윽박지르지 않고, 유려하게 밑으로 밑으로 흐릅니다.


 '어질다仁'는 것은 '너그러움'을 의미합니다. '어진 사람'에게는 '품는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묻고 관찰하는 것을 넘어, 깊은 포용으로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래서 '어질다'는 말의 의미는 '크다'는 말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차분하고, 기준으로 구분하지 않아 많은 것을 끌어안는 '어진 사람'은 큰 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그 품 안에 머무는 이'가 많아져 '어진 사람'은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진 이의 품 안에서 수많은 것들의 원형이 드러납니다. 큰 품 안에서 만나는 큰 사랑과 자신과 다른 수많은 원형들을 마주하며 '자기自己'를 찾습니다. 산이 그러합니다. 크고 높은 산은 품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산자락에 머물 수 있고, 그 안에 머물며 자신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양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우뚝하니 높이 서있어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너그럽고 깊은 품입니다.




(왼쪽)김아름_비와 손_ 종이 패널 위에 수채_73x73cm_2021, (오른쪽)김아름_눈과 손_종이 패널 위에 수채_100x80cm_2021


 물과 같은 물성物性이 도드라지는 그림에서, 직접적인 움직임을 묘사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흐르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비처럼 위에서 아래로 정직하게 떨어지거나 편안하게 늘어져있습니다. 흘러넘쳐 자연스럽게 밑을 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김아름 작가님의 표현은 경직되지 않고, 수채는 대상을 덮거나 가리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꽉 차있으면서도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아, 언제든 누군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 줄 것 같은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것들이 담긴 화폭을 보고 있으면, 화폭에 담긴 모든 색은 '차가운 색'이라고 일컬어지는 색들마저도 다른 그림의 색보다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다채롭게 뻗은 검은 실 같은 획들, 뒤집어진 하트 역시, 자유로운 흐름을 보여줍니다. 분명한 모양을 보여주면서도 고집스럽지 않습니다. 특히, 트는 모양이 뒤집어져 있거나 틀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하트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뾰족한 밑이 하늘을 보며 누워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도 본인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장 편한 곳을 찾은 것입니다.


(왼쪽)김아름_손과 얼굴_종이 패널 위에 수채_100x80cm_2021, (오른쪽)김아름_얼굴_종이 패널 위에 수채_30x21cm_2020


 '사랑'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시는 김아름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사랑은 물리적인 표현으로 '흐른다'에 어울린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습이 분명한 '하트'처럼 명확한 방향성과 집결된 의지를 가집니다. 그래서 방향 없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어찌할 수 없는 기체보다 훨씬 분명한 물성을 가집니다. 확고한 물성을 가지기에,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와 같은 중요한 섭리에도 충실합니다. 나아가, '사랑'은 '거부하지 않고 흘러내리며 이해한다'는 섭리를 이해해야만 '흐르지 못하는 고인 물'처럼 문제가 생기지 않고, 그 사랑을 충분히 발휘합니다.


 '사랑'은 점점 깊은 곳으로 흘러 원형으로 향합니다. 본질과 본모습을 밝혀주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얼굴과 같은 겉모습은 흐려지고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던 손은 힘이 빠지며 놓아주는 손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김아름 작가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손은 무언가를 가두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뻗어진 한 손만 등장하며,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붙잡으려 한 외부의 상들은 흘러내리는 '사랑' 앞에서 가장 먼저 흩어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서재웅_열매가 되자_나무, 먹, 채색, 실_21.4x15.2x90cm_2021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일까요. 서재웅 작가님은 작품의 앞과 뒤를 따로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정면正面입니다. '열매가 되자'를 보면서도 자연스레 열매가 있는 쪽이 앞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면面의 자욱들에서 눈과 입과 입에서 불어 나오는 숨결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오히려 구체적으로 조각된 곳은 반대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이 앞일까요. 하지만 제목에 담긴 '열매'는 조각된 그 반대편에 있는데, 그렇다면 어디가 앞일까요? 이제 앞과 뒤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열매를 매달아 반대편에 길게 늘어진 실은 얼굴 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같습니다. 알고 보니 따로 얼굴을 조각하지 않았던 반대편마저도 우리는 얼굴을 찾아내고 말았으니, 이제 양면兩面이 모두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재웅 작가님의 조각은 요리조리 살펴보아야 완성됩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감상해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왼쪽)서재웅_산신령_나무, 먹, 채색, 흑연, 조롱박_49x23x29cm_2021, (오른쪽)서재웅_맷돼지_나무, 먹, 채색, 흑연, 붓털_24.9x13.8x19cm_2020


 또, 서재웅 작가님은 재료의 원형을 최대한 살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에 십분 활용하십니다. 위에서 언급한 '열매가 되어'도 앞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면은 나무 자체가 본디 가지고 있었던 모습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이때 오히려 관객들은 작가의 의도를 기대하고 작품에 집중하기 때문에, 재료의 본래 모습에서 많은 표현을 찾아냅니다. '산신령'의 모습에서도 나무껍질을 덜 깎아 도포 같은 모습을 표현합니다. 나아가, 손과 팔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를 최대한 변형시키기보단, 그런 모습의 다른 조각을 나란히 놓아 여러 재료로 하나의 표현을 완성합니다. 앞과 뒤가 없듯이, 표현의 의도된 변형과 의도된 보존이 한데 어우러져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표현을 해냅니다. 


(왼쪽)서재웅_산신령과 평화로운 동산_한지 위에 먹, 채색_72x75cm_2019, (오른쪽)서재웅_돌풍을 부탁해_천 위에 채색, 쪽모이_88x53.7cm_2019


 비가시적인 원형이 가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서재웅 작가님께서 깊이 공부하시고 작품에 녹여내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애니미즘animism'도 원형의 그러한 양상을 이해한 태도입니다. 원형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외부적 환경, 맥락과 호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재에서 접하는 원형은 다층적이고 다원적입니다. 서재웅 작가님은 원형의 이런 점을 깊게 이해하십니다. 이런 점은 회화에서 느껴집니다. 한지와 먹 위에 먹으로 그려진 그림은 분명하게 표현하는 대상이 있으나, 구체적은 모습은 여러 표현이 겹치거나 경계가 불분명해집니다. 서재웅 작가님의 그림에서,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막상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재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원형의 다원성을 표현하는 서재웅 작가님의 방식이며, 깊은 통찰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드러나는 모든 원형의 표현은 응축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원형을 알기 위해선 원형이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모든 모양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고, 수많은 모양과 각도에서 관찰하고 바라보고, 너그러워야 합니다. 그래서 원형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습을 한 번에 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서재웅 작가님의 조각과 회화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다양성은 원형이 드러나는 응축을 이끌어내며, 이는 마치 넓은 품에서 원형이 '자기自己'를 찾을 수 있게 모든 모습을 품어 안는 산과 같은 특징입니다.




 '원형을 향하는 흐름'과, '원형을 드러내는 응축'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원형에 다가가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원형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려면 어떤 품을 가져야 하는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시는 두 작가님의 작품들의 조화 안에서, 이제 우리는 가시적 세계가 얇게 감추어 잊고 있던, 원형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미세기 화실 오픈스튜디오 금화교역金火交易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우리가 접하는 사물들이 단순히 일차원적인 감각성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 이미 상호작용하며 관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선사합니다.



/주관 및 주최: 미세기 화실(https://www.instagram.com/misegi_drawing/)

/참여작가: 김아름, 서재웅

/사진출처: 홍예지(https://www.instagram.com/yeji_cu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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