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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Oct 02. 2021

미시적인 느낌은 거시적인 물결을 담는다.

《간(姦): 간 프로젝트》

 여성, 여성성, 페미니즘


 혹은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대담론'의 파도에 휩싸여 작가의 개인적 특징과 작품의 개별적 아름다움, 관객의 개성적 경험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여성', '여성성', '페미니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는 이분법적으로 이념화되어 개인적 판단을 거부하는 모든 '정쟁政爭적 거대담론'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정쟁적 거대담론'은 모순된 특징을 가집니다. 모든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명분으로 각각의 개인에게 자기 삶의 층위에서 그 문제를 판단할 기회를 빼앗습니다. 모든 사람의 문제이기에, 모든 사람이 자신 앞의 맥락을 이해하고, 자기 가치를 가져야 하지만, 우리는 맥락을 이해하고 가치를 가질만한 여유와 기회를 허락받지 못합니다. 여유와 기회가 박탈되어 생긴 이해의 공백에 '거대담론'은 몇 가지 '틀frame'을 강압합니다. 그리고 개인들은 그 '틀'을 우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이 이상의 고민은 불필요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거대담론'이 제시하는 '틀'이 그저 수직적인 억압의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틀'은 우리 안에 오랜 시간 동안 자리하며 형성된 갈등에 기생하며 형성됩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분노, 슬픔, 혐오 등을 닮아있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 갈등을 집단 전반이 공유하고 있고, 이분법적으로 정쟁화하기 좋은 사안일 경우, '거대담론' 등장의 기반이 되며 '틀'로 구체화됩니다. 따라서 결국 '거대담론'이란 우리가 반성하고 숙고하지 않았던 우리 안의 갈등이 몰이해와 폭력으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간(姦): 간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거시적인 흐름에 묻혀 미시적인 미감美感과 경험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그 미감과 경험 안에 내포되어 있는 거시적인 흐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네 명의 여성작가가 모여 왁자지껄하게 각자를 표현할 때, 우리는 각각의 작가님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씩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 각각의 작품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미적 경험에도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왜 굳이 네 명의 여성작가가 모여야 했는지, 각각의 작품에서 우리가 느끼는 미적 경험이 어떤 맥락 안에서 형성되었는지 큰 시각에서 짚어봐야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네 분의 여성 작가님들의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과 동시에 남성 관객으로서 느낀 갈등적 경험을 동시에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근女根: 헌팅 트로피를 벗어나, 선언된 일상


구지언, <성형성을 가진 하얀 막(Mutable white membrane)>, plaster and butterfly on the wall, 가변크기, 2021


 헌팅 트로피란, 사냥꾼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크고 위협적인 사냥감의 신체 일부(뿔, 머리, 가죽 등)를 박제하여 액자와 같은 틀에 달아 벽에 걸어두는 것을 말합니다. 외설적 묘사에서 종종 헌팅 트로피는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한정한 후, 이 위에 군림한 가부장적 남성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거나, 그런 가부장제를 비꼬는 방식으로 차용됩니다. 헌팅 트로피에 갇힌 여성의 신체는 여성의 존재 의미를 성적 목적에 한정되고, 남성의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를 가둔 헌팅 트로피는 언제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전시됩니다.


 구지언 작가님은 헌팅 트로피에 갇힌 여근女根를 끄집어냅니다. 여성은 특정한 목적을 지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각각의 여근女根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개진 '개인'들의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나아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전시되던 여성의 신체를 눈높이, 혹은 그보다 훨씬 아래의 위치로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근의 일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헌팅 트로피를 벗어나 우리의 눈높이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벽 한가운데에 같은 색깔로 녹아들어 있는 여근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살아있지만 잊고 있던 여근 존재의 일상성을 이야기합니다.


 구지언 작가님은 여근의 소음순에서 나비의 몸을 느꼈다고 말씀하십니다. 페미니즘 예술에서 자주 쓰이는, 여근과 꽃을 연결 짓는 클리셰를 활용했을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구지언 작가님의 시각에서 소음순은 나비의 몸이 되고, 나비를 완성하기 위해 그 주변에 나비의 날개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비의 날개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직, 억압된 여근女根의 자기 발화가 완성되지 못했음을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근 주변에서 몸을 만나 날아오를 기회를 엿보는 수많은 나비 날개들은 여근의 자유는 언젠가 가능하다는 희망 또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 관객의 입장에서 눈높이에서 마주하는 여근女根의 존재는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여근이란, 성관계에서 혹은 음란물에서나 직시하던 것이지,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단순히 일상적으로 볼 수 없음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은 여근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일상적으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남성에게 여근이 눈높이에 위치하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한 번도 일상적인 존재로써 접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목적하에 마주하며, 목적을 달성하면 마주하지 않습니다. 도구적인 만남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근이 일상적인 벽에 자리해 눈높이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남성 관객은 황급히 다음 작품으로 도망칩니다.




여체女體: 투명하게 드러난 시선


김현지, <Untitled-1>(좌), <Untitled-2>(우), Oil on polycarbonate sheet, 112x73cm, 2021


 동일한 나체여도 왜 어떤 것은 예술작품이 되고, 어떤 것은 음란물이 될까요. 이 차이는 감상 대상과 감상 주체 각각에게 다른 맥락에서 발생합니다. 작품의 입장에서는 나체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인 표현인지, 스스로를 도구적인 대상으로 판매하기 위해 존재적 가치를 상품적 가치로 격하시키는 의도적인 왜곡으로 신체를 전시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김현지 작가님의 <Untitled> 시리즈는 여성의 신체를 어떠한 상품적 왜곡 없이 표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깨끗하고 매끈하게 꾸며진 신체를 표현하지 않고, 어딘가 지워지고, 어둡거나 칙칙한 색을 활용해 신체의 모양 자체를 표현합니다. 신체를 잘 '전시'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늘어진 살은 늘어진 살대로, 흩어졌다고 보인 곳은 흩어진 대로 그려냅니다. 


 감상 주체의 입장에서는, 주체가 대상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에 대한 한정된 목적 없이 마주하는지, 아니면 제한된 목적으로 대상의 서사적 맥락을 절단하고, 수직적인 관계에 위치시키며,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도구로 소비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시각적 대상을 포르노로 전락시키기 위해, 감상 주체는 대상을 '관음觀淫'합니다. '관음觀淫'은 필수적으로 수직적인 권력관계를 요구합니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야의 불평등'입니다. 감상 대상은 감상 주체를 보지 못하는데 감상 주체는 감상 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현지 작가님의 <Untitled> 시리즈는 '관음觀淫' 할 수 없습니다. 작품은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에는 시각적으로 앞과 뒤가 없습니다. 그 덕에, 감상 대상은 모든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감상 주체는 감상 대상을 '관음觀淫'할 사각지대를 잃어버립니다. 더 이상 감상 대상과 감상 주체의 수직적인 권력관계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눈높이의 벽이 아니라 천장에 매달려 고개를 들어야 감상할 수 있는 여성의 신체는 오히려 감상 주체를 낮은 위치에 둡니다. 여성의 신체가 '관음觀淫'의 대상이 아니라 '위력威力'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음 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남성 관객은 강제로 대상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나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한 번도 여성의 신체와 동등하게 마주한 경험이 없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는 방법은 아는데, 마주하는 방법을 모르는 남성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때 남성 관객은 일종의 막을 느낍니다. 감상 대상을 마주할 수 없어 대상과 자신 사이에 느껴지는 어색함의 막, 나아가 자신이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방법밖에 모르니, 타인 역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느끼는 사회적인 수치심의 막. 이때 남성 관객은 작품에 자신의 불안감과 어색함을 투사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이 작품은 욕정과 관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수많은 작품이 들어온 이 유서 깊은 평가는, 남성 관객이 느끼는 수치심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작품에 덮어 씌우는 누명에 불과합니다.




여혐女嫌: 끊임없이 욕구하면서도, 끊임없이 밀어내는


정두리, <무제>, 145.5x224.2xm, 2021


  정두리 작가님의 <무제>에서, 포르노그래피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환상적 이미지와, 여성과 음란을 표현하는데 차용되는 다양한 혐오적인 대상들을 한데 섞어 놓습니다. 음란물에서 표현되는 '관능'적인 여성의 자태나 편파적 이미지들과 함께, 뱀과 거미 같은 자연물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 둘은 잘 어우러지는 것 같으면서도 극심한 불협화음을 냅니다. 그래서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정두리 작가님의 포르노그래피와 혐오적 시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느껴짐과 동시에 작품을 뜯어보는 것을 불쾌하고, 메스껍게 만드는 장면들이 존재합니다. 기존 음란물 혹은 편협한 시각이 담긴 매체의 일부와 혐오적 대상이 버무려지면서 만든 메스꺼움은 '관능官能'이라는 단어에 깔려있는 가부장제의 부적절한 시각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이기도 합니다.  


 여근女根과 여체女體를 지나 <무제> 앞에서 남성 관객은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적당히 익숙한 이미지들이 난립하면서, 적당히 '소비적' 시선을 숨길 수 있는 자연물들이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적나라하게 전시된 혐오적인 대상들은 결국 이 작품마저 불편하게 만듭니다.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투사한 수많은 '혐오물'들이 얼마나 부당하고, 부조리한 평가였는지 느껴집니다. 여기서 남성 관객은 일종의 수치심을 느낍니다. 자신이 마주하기도 힘든 대상들을 가부장제가 여성들에게 투사하고 이를 가감 없이 소비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여담女談: 미완으로 남는 여성 혹은 퀴어 서사


조은후, <이안테>(좌), <이피스>(우), Oil on canvas, 91.0x91.0cm, 2021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조은후 작가님의 작품은 여성으로는 완결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서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안테와 이피스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동성이기 때문에 둘의 사랑을 허락되지 않습니다. 계급적 차이도 있지만, '결단코' 극복할 수 없는 '동성 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애틋하고 구구절절한 사랑에 감복한 신은 이피스를 남성으로 '변신'시켜줌으로써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의미는 '구구절절한 사랑은 하늘도 감복한다'는 낭만적인 문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끔찍한 억압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이안테와 이피스 앞에 놓인 계급적 차이는 수많은 이야기에서, 다양한 서사를 통해 극적으로 극복됩니다. 신과 같은 초현실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존재나 각종 마법의 도움 없이 말입니다. 팽배한 계급사회였던 과거에도 계급적 차이는 인간의 서사 안에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성 간의 사랑'은 인간적 노력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변신 이야기'의 서사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동성 간의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이 되지 않는다'는 '평서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표현된 '평서문'은 가부장제는 '동성 간의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하지 말라'는 수직적인 '명령문'을 내포합니다. 조은후 작가님은 이 유구한 명령을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뒤집습니다. 하위문화로 취급되는, 그래서 가장 부담 없이, 흔하게 마주치는 애니메이션의 틀에 가부장제의 명령을 담습니다. 당당한 '끌어내림'입니다. 독재 정권이 세운 독재자의 동상을 시민들이 무너뜨리듯, 더 이상 가부장제의 명령이 숭배와 위계를 가지지 않고, 그 위상을 한껏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남성은 주류로 군림하지 못한 하위문화를 혐오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오타쿠'는 가부장제 아래, 남성들이 남성 집단에서 도태된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쓰는 낙인입니다. 조은후 작가님은 하위문화로 지목되는 애니메이션 역시 예술의 범주 안에 존재하는 분명한 표현방식이라는 점을 이해하며 얼마든지 역사적 억압과 폭정을 거부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소외시킨 표현력의 부활입니다. 하지만 남성 관객은 여전히 표현력을 소외시킨 가부장제의 맥락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전시장 복판에 걸린 애니메이션 삽화에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을 '오타쿠'로 인식할 남성 집단의 시선을 내면화합니다. 마지막 작품에서도 오랜 시간 머물 수 없는 남성 관객에게 남은 선택지는 전시장을 나가는 것뿐입니다.




 남성 관객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성 혹은 여성성을 '판매'하지 않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작품과 전시에 녹아들지 못하는 가부장제 남성들에게는 작품과 전시장에서 튀어져 나오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을까요. 이는 전반적으로 남성에게 예술적 심상이 극히 제한되었고, 심지어는 거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목적적, 심미적 대상으로 무언가를 마주하는 방법을 모르고, 착취와 소비라는 도구적, 권력적 방식 외에 가부장제는 어떠한 관계 방식도 남성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관계의 상상력을 위축시켜 다양한 방식으로 개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없게 만듭니다.


 이 맥락에서, 간(姦): 간 프로젝트는 여성작가들의 여성성의 해방을 기대하는 각자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또다시 유리컵을 깨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모였지만 생각보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크지 않은 직사각형의 공간에서,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역사적 서사를 찾을 수 있고, 그 서사를 따라 가부장제에 익숙한 남성이 느끼는 불편함을 집약적으로 이끌어 냅니다. 이 경험은 가부장제가 남성에게서 탈락시킨 예술성이란 무엇인지,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예술성을 탈락시킴으로써 어떻게 남성을 억압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품고 있습니다.



/장소: 공유예술공간 파도(https://www.instagram.com/pado_spacewave/)

/참여작가: 구지언, 김현지, 정두리, 조은후

/사진출처: 홍예지(https://www.instagram.com/yeji_cu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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