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숲 May 31. 2016

동주

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우리의 말과 글로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것 만으로도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말과 글을 함부로, 서툴게 써 대는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절대 모를 어떠한 간절한 마음을, 그 시절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 그러나 실상 제대로 알지는 못했던 시인. 윤동주에 관한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이것으로 여섯번 째. 재미있긴 하지만 베스트는 아닌, 그런 영화들이었다고 생각했다. 천만관객의 신화를 썼던 <왕의 남자>조차도 사실 나는 그렇게 쏙,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다. 영화 <동주>는 그런 나에게 있어 한동안은 이준익감독의 최고작, 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경성의 문인들을 좋아하는지라 이 영화의 개봉을 정말 손꼽아 기다렸었고 개봉날 버선발로 달려가 영화를 보았고 그로부터 며칠 후 또, 한번 더 챙겨보았는데도 다시 한 번 보고싶은 영화다. 그 어떠한 감정적인 강요 없이, 담담하게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그 시절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느꼈을 폐색감을 더 절절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전혀 담담하지 않은데, 담담할 수가 없는데, 담담해야만 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느껴야 했을 그 무력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한국영화는 감정과잉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너무 쉽게 화를 내며, 너무 자주 오열한다. 그러한 감정 과잉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피로해지곤했다. 내 감정을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동주>는 울어라, 감동받아라, 막무가내로 강요하지 않지만, 절로 감동에 북받쳐 눈물흘리게 만들었다. '어떤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만큼 세련된 태도는 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피해자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섬세하지 못한 연출로 영화의 의미를 퇴색시길 때가 많았다. (뭐 이런저런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지만 비밀이 부치며...) <동주>는, 그러한 점에서 아주 훌륭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흔히들 '부끄러움의 미학'이라고들 평한다. 영화 <동주>는 그 '부끄러움'의 감정이 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 하고 있다. 용기가 없어서 혹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쩌면 그는 사촌형 송몽규의라는, '행동하는 인간'을 눈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기의 존재 자체가 시대에 빚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부책의식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시대에, 그렇게 어쩔수 없이 생겨나버린 죄책감을 곱씹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적혀졌을 부끄러움의 시. 하지만 우리 글을 사용하는 것 조차 불법이던 시대에 시인 동주의 시는, 그 자체만으로 저항이었으며,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걸을 우리는 이제 안다. 내가 경성의 문인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글로,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한번쯤은 더, 챙겨보아야겠다. 


(+) 영상미도 정말 뛰어났던 것 같다. 특히 몽규와 동주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의 풍경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객 섭은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