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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이 Jan 06. 2022

남들보다 기억을 잘하는 사람

리메이크


 “현서야. 예전에 내 동생이 엄청 욕하던 회사 상사 있잖아. 맨날 얼평 옷평 해댄다고. 알고 보니까 우리 동아리 김수학이었다? 대박이지. 너무 좁아”

 "미친. 인성 어디 안 가네. 그때 그 선배가 나보고 주름 쭈글한 피글렛 같다고 했었잖아. 지는 무슨 동태 눈깔처럼 생겼으면서."

 "헐 미쳤다. 진짜. 지 주제를 알아야지. 현서야 근데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해?"

 "그러게 11년이 돼 가는데 장면도 기억나네. 진짜 어이없었나 봐"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마다 깨닫는 게 있다. 나는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다. 특히 어떤 사소한 디테일까지 아주 잘 기억난다. 추억은 물론이고 당사자도 잊고 있던 8년 전 발언, 옷차림, 함께한 그날의 풍경까지 세세하게 읊을 수 있다. 눈앞의 다정이는 곧 결혼을 앞두었다. 다정이와 남자친구는 10년 차 커플. 10년 동안 단 하루뿐이었던 이별을 가장 생생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나다. 본인들은 까먹었던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나는 어째 장소와 대화와 전개까지 다 기억난다. 이미 몇 년 전에 없어지고 두 번이나 가게가 바뀐 자리에 있던 카페에서 생전 처음 이별을 한 그 커플은 학교와 길거리를 오가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단다. 다정이보다 컸던 남자친구가 다정이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게 너무 슬퍼서 이별을 고한 다정이마저 눈물을 흘렸다는 디테일까지. 왜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기억이 난다.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도 잊어가는 그런 기억을 내가 일러주면, 처음엔 '뭐지? 그랬나?' 싶은 반응이 주를 이룬다. 뒤이어 상황의 디테일까지 내가 줄줄 읊어주면 기억을 되찾은 그들은 아주 신기해한다. 여기서부터 반응이 나뉜다. '아니 현서 천재야?'부터 '뭐야 소름 돋아' 혹은 예의 그 무시하는 눈빛을 담은 '아니 그걸 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어?'까지. 방금 다정이는 적당한 놀라움을 담은, 허용범위의 ‘아직도 기억해?’이지만,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단 것으로 어떤 방식이든 깎아먹으려 드는 범주의 발언을 들을 때면 영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런 반응들을 몇 번 겪고 나자, 그런 사람들에겐 굳이 기억이 나더라도 일러주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여러 반응을 통해 나는 내가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단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리고 나이가 먹을수록 확실해졌다. 남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던데, 나는 어째 나의 일들도, 함께 시간을 보내온 그들의 일들도 잘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상황의 디테일, 발언, 풍경, 시각적, 청각적 자극들 뭐 이런 것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감정까지 아주 잘 되살아난다. 또 다른 친구 성수는 어쩐지 매번 사랑에 빠질 때마다 이런 사랑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성수의 찐사랑의 기억들은 수명이 짧았다. 하나의 찐사랑은 끝나면 기억이 삭제되는 것인지, 어느덧 4명째 '이전과 다른 찐사랑'을 할 때쯤엔 성수의 찐사랑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과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었더랬다. 그 이후로도 성수는 3번의 찐사랑을 더 한 뒤 잠시 솔로로 지내고 있다.    


  남의 이야기도 이런데 실제로 내게 일어났던 사건과 감정은 말할 것도 없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얼마든 다시 빠질 수 있다. 첫 남자친구와의 맨 처음 순간, 친구로 소개받으며 떠올랐던 ‘왠지 이 사람이랑 언젠가 한 번은 뽀뽀를 할 것 같아’와 같은 미묘한 느낌, 20대 초중반의 어느 날, 지지부진했던 썸 끝에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재밌긴 한데, 얼굴이 너무 내 취향이 아니더라’는 말로 몸 속 피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던 수치심, 전남친이 군대 휴가 나와서 바람피운 사실을 알았을 때의 끔찍함. 뭐 그런 것들. 사소한 감정들부터 진짜 다시는 되살리고 싶지 않은 감정들까지 참 죽지도 않고 살아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일을 떠올렸을 때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날아가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 생생하게 그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나 그 감정의 끔찍할수록. 끔찍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잘 극복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매번 그 시간 그 장소에 이끌려 도착해서, 똑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그대로 머리부터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괴로운 경험이 남긴 감정들을 그대로 느낄 때면 항상 자괴감이 함께 몰려왔다. 나는 왜 이걸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가지고 있지. 이런 게 트라우마라면 극복하고 싶은데 나는 왜 극복하지 못하지.


 게다가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은 대단한 응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번 이끌려가던 과거의 기억 속 디테일들은, 또 다른 상황에 쉽게 투사되었다. 눈앞에 다른 상황, 다른 사람과 있는 현실에서도 내 기억의 조각들은 마구 침범했다. 전 남자친구와는 아주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전 남자친구의 기억과 관련된 단서가 보이면 곧장 현재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울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에서 그가 바람을 피울 수 있는 단서들을 끌어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뚝딱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떠올린 후엔 꿈에서 리메이크 작업이 진행된다. 현 남자친구가 전 남자친구와 같은 대사로 나를 괴롭게 하는 그런 꿈. 영상으로 리메이크된 과거는 그렇게 다시 나한테 감정을 일으켰다. 비단 연애뿐 아니었다.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이나 스트레스 상황에도 끊임없이 리메이크가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다른 현실이 눈앞에 있는데도, 나는 기억을 투영해 현실을 과거 트라우마의 리메이크로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머릿속에서 리메이크된 것과 엇나가게 전개된 현실을 몇 번이나 경험하고도 이 과정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대가라도 되는 것인지, 끊임없는 머릿속의 리메이크는 과거의 상처를 덧나게 했다.



 그럼에도 기억을 잘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도 있다.  새내기 시절, 동아리 모임에서 처음 만난 은수는 빨간 외투를 입고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술집을 어떻게 가니마니 하고 있는 어색한 시간에 은수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동갑인 재수 새내기라기에 슬쩍 가서 말을 걸었다. 

   “저 우리 동갑인데, 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어?”

  그랬더니 은수는 예의 그 퉁명스러운 말투로 주머니에서 손도 빼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어 좋은데, 지금 추워서 이따 알려주면 안 돼?”

 민망해진 나는 속으로 ‘아, 얘랑은 못 친해지겠다’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렇지만 그 친해지지 못할 것 같던 빨간 외투의 여자애는 20대 통틀어 가장 열심히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은수는 잊은 우리의 첫 만남은 내가 기억에서 꺼내어 놀릴 때마다 되살아나고, 은수에게도 새롭게 덧입혀진다. 함께 한 친구가 잊었더라도, 내가 되살려줄 수 있어서 그 시간들은 계속 공유될 수 있다. 공유된 작은 기억들은 함께 관계를 꼭 붙들어 맬 수 있는 힘이 된다.


 또 언젠가의 내 모습으로 날아갈 수 있다. 이미 끝난 어떤 연인과 함께 상수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구석만 있으면 입을 맞추던 순간이라던가, 아침에 먼저 깨서 아직 자고 있는 그 친구의 볼때기를 콕콕 찌르던 순간이라던가. 더 이상 함께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의 인생에서 흔치 않게 웃음을 참기 어려울 만큼 기쁘고 재밌던 순간으로 당장 시간여행할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또 슬퍼지기도 하겠지만. 


 “현서 기억력 좋아서 가끔 무서워.”

 “맞아. 현서 진짜 웃겨. 맨날 일기 써서 그런 거 아냐?”

 “나도 가끔 웃겨. 너네가 기억 못 하는 것도 좀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자세하게 기억나서    얘기할 때 나도 민망해.”


 과거를 잘 기억하는 게 그냥 나의 특성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요즘도, 가끔 궁금하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기억력과 트라우마를 한꺼번에 없앨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것이 나에게 좋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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