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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방 Oct 26. 2021

초파리 같은 존재

 

 평일 아침. 재택근무를  때의 장점은 아침 시간의 여유로움이다. 커튼을 활짝 열고 방에 해가 들도록 하고, 아몬드브리즈에 콜드브루를 넣으면서 흥얼흥얼 대는 오전 9 30분은 하루  제일 평안하다. 출근한 사람이든 재택 중인 사람이든 아직 나를 찾는 메신저 연락은 없고,  몫의 노동시간이   안에서 흐르는 . 30 이후로 생긴   마음 불편한 죄책감 없이 평안할  있는, 흔치 않은 행복이다. 제일 마음에 드는 회색 머그컵을 골라 들어 뽀얀 아몬드브리즈를 붓는 순간. 익숙하고 재빠른 물체가 아몬드브리즈 폭포로 날아든다.

 "아이씨!"

 욕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놈의 초파리.

머그컵 안에는 뽀얀 아몬드브리즈와 대비적인 까만색 시체가 둥둥  있다. 망연자실하게  속을 바라볼 , 오른쪽 시야 끝에서  비슷한 까만  같은 물체가 보인다.  그쪽으로 눈알을 돌려봤자 이미  물체는 사라져 있다. 그리고 재빨리 돌린 눈동자를 따라 뒤늦게 까만 선과 점들이 시야로 흘러 들어온다. 세포 모양 같기도 하고  옛날의 기호 같기도  뿌연 점과 선들.   전에 받은 라식수술 이후로 항상 함께해온 눈알 안의 벌레들, 비문증이다.  왼쪽 시야 끝에 뭔가  날아든다. 비문증이겠지, 했지만    날아든다. 아이  개 같은 초파리 놈들 내가  요리 해먹지도 않는데  생긴 거야! 혼자 씩씩대며 아몬드브리즈를 개수대에 왈칵 부어버리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져 머그컵이 쿠당 소리를 내며 개수대에 내리 박는다. 다행히 컵은 깨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평안은  순간 와장창 하면서 박살나버렸다.

 

 평화로워야 했을 9시 30분도 평화롭게 보내지 못한 오전은 엉망으로 흘러갔다. 나를 찾는 메신저 소리는 원래 거슬린 정도의 3배 정도로 거슬리게 느껴졌다. 회계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노트북이 버벅댈 때마다 주먹으로 쾅 내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꾹 참아내야 했다. 바로 그 타이밍에 시야의 가장자리를 스쳐가는 초파리는 나를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초파리가 보이는 순간 비문증은 더욱 존재감 있게 눈에 인식되어 눈앞이 벌레 파티가 된 듯했다. 파워게이지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듯, 오전의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는 단계 단계 차올랐다.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초파리를 박멸해버리겠단 생각에 락스를 꺼내왔다. 세면대, 샤워부스, 화장실 바닥까지 하수구와 연결된 모든 구멍들에 락스를 부어버리자, 뭐라도 했다는 생각에 살짝 스트레스 게이지가 내려가는 듯했다. 그때, 유난히 큰 갈색 섞인 초파리 한 마리가 바로 눈가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이젠 욕도 나오지 않고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뚱땅 뚱땅. 듣기 싫은 회사 메신저 소리가 여러 차례 나고 있던 것을 인지하자 아차 싶었다. 서둘러 노트북 앞으로 가자 메신저의 빨간불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준 본부장 10:23] : 박 대리, 금요일에 말한 보고서는 언제 제출 가능한지

 [원준 본부장 10:26] : 박현서 대리님.

 [원준 본부장 10:28] : 박현서 . 재택근무 중에 어딜 간 건가?

 락스를 붓던 5 사이에 본부장은  차례나  찾았다. 원준 본부장은 극단적인 재택근무 반대자로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마다    찔러보기며 응답 속도를 체크하는 것으로 직원들에게 정평이  있는 사람이다.  정말 5 사이에 너무하네, 생각하고 있을 , 전화벨이 울린다. #균상팀장.

 네 박현서입니다.

 박 대리. 지금 어디야? 본부장님이 찾으시는데.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본부장님께 답변드리려 했습니다.

아니 본부장님 노발대발하시는데 어디야? 집은 맞아? 왜 대답 안 했어?

화장실에 다녀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이 32, 아빠도 아닌 중년의 아저씨에게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흘릴 ,  코를 향해 날아들던  없는 초파리가 콧김에 놀라 비스듬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11시 45분. 겨우 점심시간이 되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줘서 쾅. 까진 아니고 콩. 소리가 나게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다시 눈을 뜨자 비문증들이 아래쪽에서부터 찬찬히 시야의 가운데로 올라왔다. 흐힛. 이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했듯 내 나이 32살. 벌레들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지 스스로 비웃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지금 내 상태가 예민하다고 인지할 수 있었지만, 예민해졌다는 것을 인지해도 예민해진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선 뭘 해도 될 리가 없다는 것은 32년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피 같은 점심시간을 어찌 보낼지 몰라 일단 집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쌀쌀해진 날씨에 자동으로 팔짱을 끼고 어깨를 움츠리게 되었다. 익숙한 가게들을 잰걸음으로 지나는데 맘에 드는 식당은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밝은 낮 길거리 풍경들 위에는 기호 같은 점과 선이 왔다 갔다 하며 한 겹 덮고 있었다. 집 안에서 볼 때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다독여가며 걸음 속도를 올렸다. 흐으 짜증나. 마스크 안으로 소심한 입모양으로 내뱉었다. 조금 걷자 바람이 불면서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마스크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머리카락들은 볼 여기저기를 간지럽혔다. 마스크를 짜증스럽게 벗어버리다가 그만 줄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오늘 하루를 더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질 정도의 짜증이 밀려들어왔다.


 보통의 나라면 그렇게까지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히는 것도, 맨날 우스웠던 회사의 어른들을 보는 것도,  년째 보고 있는 비문증도. 이렇게까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짜증은 스트레스를 받는 기준, 역치가 낮아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평소엔 평정심을 유지하고도 남을 수많은 잽들이  . . 치명상을 입히는 펀치마냥 바뀐 것이다. 잽을 펀치로 바꾸는  마법을 고작 초파리. 손에서 잡아 뜯은 각질만큼 작은 초파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초파리가 레버를 내리듯 낮춰 버린 스트레스의 역치에, 나의 하루는 이렇게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준이란 것은 얼마나 나약한지 고작 초파리 때문에 바뀌냔 말이다.

 

 상념에 잠겨 걷다가 돌아온 방문 . 초파리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문을 열었다. 이때다 싶은 초파리  마리가  밖으로 날아들었고,

  !

좁디좁은 오피스텔 복도에  포효가 가득해졌다. 그래 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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