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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방 Jun 03. 2020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살면서 꾸준히 해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허무하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숨쉬기, 먹고 자기, 걷기 말고는 손가락을 하나 꼽기도 어렵다. 아직 살아온 삶이 충분치 않아선지,  빠졌다가  질리는 성향 탓인지, 아니면 남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좋아하는 줏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로든 ‘꾸준하게 000 했어!’라고   있는 것이 드물다.  000 들어갈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글쓰기다.



    글쓰기는 순간을 붙잡는 도구였다.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1살 새내기 시절. 건축학개론이 개봉하고 벚꽃엔딩이 발매됐던 2012년 봄날이었다. 인문대 신양에 앉아서 바라보는 창 밖 풍경이 참 반짝거렸다. 대학 입학, 첫 동아리 활동, 첫 연애까지 모든 것이 시작되는 21살 나의 시간들도 그랬다. 그 시간이 빛난다는 것을 당시의 어린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고 싶었다. 영영 박제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20대를 줄곧 붙잡아온 일기 쓰기였다.



   빛나는 시간은 짧았다. 첫 연애는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남자 친구의 사진으로 끝났고, 첫 동아리 활동은 회장으로서의 중압감, 그로 인해 나답지 않았던 모습으로 처음의 즐거움을 잃었다. 설렘은 공허함으로, 자신감은 좌절로 쉽게 모습을 바꿨다. 강하고 두텁게 빛나던 것을 얇게 두드려 핀 것처럼 엷고 짙은 우울이 찾아왔다. 그때도 일기를 썼다. 끝나버린 연애 후에 혼자 처리해야 하는 너저분한 말들을 일기에 쏟아냈다. 너무나 잘나 보이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한없이 나를 깎아먹는 생각들도 일기에 썼다. 혼자 있는 방 안 외로움의 원인을 찾아 헤매는 삽질도 일기에 담았다. 일기장은 어느새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있었다. 즐거운 일보다 우울한 시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가던 즈음, 감정의 쓰레기통이 있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의 20대의 즐거운 것, 우울한 것, 심심한 것까지 품으며 일기장은 쌓여갔다. 그 사이 글쓰기는 감정의 쓰레기통일 뿐 아니라 내게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그러다 위로를 받은 날도 있었다. 여기까지 였다면 글쓰기는 순기능만 있는 행위일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잊어도 되는 작은 생각들이 기록되면서 몸집을 부풀려 나를 뚜드려 패기도 했다.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 두근대며 기록하고 보면, 보잘것 없이 앙상한 몇 줄의 문장뿐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이건 똥이야. 난 또 쓰레기를 생산했어.’라고 생각하며 써제낀 글이 내 마음 혹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도 있었다. 현실을 사는 것도 알 수 없어 죽겠는데, 내가 쓰는 글마저도 예측할 수 없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가 ‘글을 쓰는 것은 어떤 것도 구원해주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 문장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글쓰기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인간관계, 진로, 감정, 생각, 일상의 많은 것들이 내 마음처럼 안되니까, 글쓰기라도 날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게 은근하게 한 구석에 있던 것이다. 쓰는 것이 내 기분을 더 좋게 해 주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주고, 뭐 심지어 언젠가는 내게 성공과 행복까지 가져다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해왔던 내면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어떤 것도 구원해줄 수 없었다. 그게 맞았다.



  그래서, 글쓰기는 이제 빛나는 순간을 붙잡는 도구도, 나의 어떤 구원도 아니다. 감정의 쓰레기통 정도는 여전히 맞다. 그럼에도 계속 쓴다. 꾸준함이 가져온 관성인지, 글이기에 내가 꾸준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하루하루 내 안에 쌓여가는 것들이 어느 날 임계점을 넘고, 그걸 부에엑 글로 토해 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줏대 없는 내가 시선과 상관없이 하는 몇 안 되는 행위. 나만의 배설. 구원이 아니더라도, 붙잡을 빛나는 순간이 없더라도 어쨌든 계속 써야 하는 사람이면 써야지 어쩌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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