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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울 Mar 29. 2024

내 남편은 스마트 컨슈머

남편은 ‘스마트 컨슈머(smart consumer)’이다. 스마트 컨슈머란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구매하는 소비자를 말하는데, 우리 남편이 그렇다. 물건 하나도 단번에 사는 일이 없다. 아울렛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해도 절대 바로 사지 않는다. 가격 태그에 함께 적혀있는 모델명을 확인하고는 해당 모델을 국내 사이트는 물론 해외직구(배송비를 포함하여)까지 비교해 보고 계산대에 가져간다. 그의 합리적인 소비는 결제 단계에서도 이어진다. 남편이 현재 사용 중인 카드만 열여섯개에 이르며, 놀랍게도 각각의 카드는 구매처, 구매 금액, 적립/할인 여부, 전월 실적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쓰임이 있다. 그중 몇 카드는 전월 실적을 채워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그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테크*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카드는 매달 가전 렌탈 비용에서 15,000원을 할인해 주는 혜택이 있는데, 이를 받기 위해 전월 실적 30만 원을 상품권 결제로 채우고, 다시 현금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실제 30,900원인 정수기 렌탈비용을 15,900원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더해 온갖 플랫폼의 할인 기간을 꿰고 있는 남편 덕분에 가끔 의도치 않은 소비가 생길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가계에 보탬이 되기에 나는 이런 남편의 현명한 소비 습관을 참 좋아했었다.   

상테크: ‘상품권+재테크’의 줄임말로, 실제 지출 없이 카드 전월 실적을 채우거나 캐시백을 받는 재테크를 말한다. 단, 카드마다 상품권 결제가 실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유의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기술을 사랑하는 공학도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신기술은 언제나 그에게 큰 관심거리이다. 뭐든 아껴서 사는 남편이 아낌없이 소비하고 싶어 하는 게 있다면 바로 기술집약적인 제품들이었다. 아이맥, 아이폰, 카메라 같은 것들이 대표적으로 그가 사랑하는, 기술집약적인 제품들이다. 문제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 대부분 턱턱 구매하기엔 ‘헉’하는 가격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가정을 이뤄 매달 갚아야 할 빚도 한층 늘어나 섣불리 구매로 이어지긴 어려워졌다. 큰돈을 쓰기 위해, 기술에 큰 감흥이 없는 나를 설득해 내는 과정이 더해졌으니, 더욱 어려워졌을 법도 하다.


그러더니 요즘 들어 나를 공략하여 마침내 무너뜨리는데 요령이 생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먼저, 자신이 해당 제품이 없어서 얼마나 불편한지 구체적인 사례를 늘어놓는다. 제품은 가졌지만 새로 나온 버전을 또 사고 싶다면, 현재 쓰고 있는 제품에 대해 최대한 무심히 흉을 본다. 이때 자신이 얼마나 불편한지 최대한 생생하게, 하지만 은밀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부인의 단계이다. 자신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결코 사달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다만, 이때도 정말 필요 없냐 되물을 땐 ‘있으면 나야 좋지. 근데 비싸잖아’하고 멋쩍게 덧붙인다. 세 번째 단계는 미련이다. 쇼핑몰을 갈 때마다 ‘우리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라며 미련을 폴폴 풍긴다. 내가 볼 수 있는 앞에서 핸드폰으로 종종 제품의 최저가를 찾아본다면 금상첨화다. 마지막으로 위의 세 단계를 여러 번 반복하여 자신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자전거도 그가 사랑하는 그런 제품 중 하나였다. 어느 날부턴가 나에게 낡은 자전거 이야기를 많이 하더니, 틈만 나면 자전거 모델이 뭐가 좋을지 찾아보는 게 그의 새로운 취미가 된 듯했다.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남편을 보면서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이번 생일 선물은 자전거로 하자.


“사고 싶은 자전거가 도대체 얼만데?”

드디어 흔들리는 나를 본 남편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200만 원 정도…?”

정확한 금액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그 이상이라는 것이겠지. 생각보다 자전거가 무지하게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가성비 있는 게 그 정도 수준이야. 비싼 건 몇백이 뭐야. 천만 원도 넘더라고.”

“뭐? 천만 원?! 오빠가 프로도 아니고 그 정도 금액까지 사는 건 사치 아닐까. 200만 원 주고도 살까 말까인데”

화들짝 놀라 마음을 바꿀까 불안해진 그는 서둘러 덧붙인다.

“만약에 지원해 준다면, 200만 원 초과하는 비용은 내가 용돈으로 부담할게.”

마지막 카드였다. 남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개인 용돈 20만 원을 모아서 보탠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였다. 그래, 사자 사.


그동안 열심히 찾아본 그는 이미 어디 가서 사야 제일 싸게 살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석계역 인근의 오프라인 매장. 시세보다 2~30만 원 싸게 살 수 있다며, 한껏 들뜬 남편은 내친 김에 그곳에서 새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오겠다고 선언했다.

“35km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 타고 오겠다고?”

“응! 빨리 달리면 2시간 컷도 가능할 것 같아”

이미 신이 나서 헬멧과 보호대를 찾고 있는 남편을 말릴 틈은 없어 보였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 출발했다며 전화가 온 지도 벌써 두 시간이 넘어섰다. 그때, 나의 걱정을 알기라도 한 듯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리고선 들려오는 숨이 찬 목소리.

“벼울아, 내가 정말 거의 다 왔는데… 탈수가 왔나 봐. 도저히 힘들어서 갈 수가 없어. 혹시 포카리스웨트 한 병만 좀 사다 줄 수 있을까?”

예상치 못한 부탁에 서둘러 그를 찾아갔다. 집까지 자전거로는 5분도 안 남은 거리. 탄천 자전거 길에서 아파트 단지로 올라오는 마지막 오르막에서 말 그대로 대자로 뻗어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달려오다가 탈이 난 모양이었다. 널브러져 있는 신발과 각종 보호장비들 옆으로 반짝이는 자전거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쓰러지는 와중에 자전거는 지키려 한 그의 모습이 상상돼 웃음이 새어 나왔다. 1.5L 포카리스웨트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운 그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이미 경련이 온 다리는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오빠 이대로는 집에 못 가겠다. 119를 불러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살면서 처음으로 119를 불러보았다. 구급차에서 대원들이 내리고 남편은 들것에 실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내 손을 잡으며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자전거는 어쩌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본인의 다리보다도 자전거의 안전이 제일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자전거 집에 들여놓고, 차 타고 쫓아갈게. 걱정 말고 병원 가있어”


그 고생을 하여 산 자전거가 그리도 오래 전시만 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구매 직후엔 무리한 다리에 휴식이 필요해서, 곧바로 찾아온 겨울엔 자전거를 타기엔 너무 추워서 자전거는 현관에 줄곧 세워져 있었다. 봄이 된 출퇴근 길은 근무시간 동안 밖에 묶여 있을 값비싼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 갈까 봐 타고 다니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15평의 좁은 집에서 당당히 0.5평은 차지하고 있는 200만 원짜리 자전거를 보면서, 이 좁은 집에 귀한 자전거를 저렇게 모시고 사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2년 여가 지나는 동안 스무 번은 탔으려나.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 자전거 있잖아. 당근 할까 봐.”

“미쳤어? 어떻게 산 건데 그걸 왜 팔아!”

“나에게 맞지 않은 물건이었던 것 같아. 어릴 적에는 돈을 많이 벌면 사이클용 자전거 하나, 출퇴근용 접이식 자전거 하나 좋은 걸로 마련해 두는 게 꿈이었거든? 근데 막상 사두고 보니까. 나에게 값비싼 자전거는 필요하지 않았던 거 같아. 아까워서 타질 못하잖아?”

“아끼지 말고 타고 다니면 되잖아. 안돼. 그래도 오빠가 사고 싶다고 큰마음 먹고 산 건데, 제값도 못 받고 팔 순 없어.”


결국 나의 성화에 남편은 당근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비싸게라도 주고 살 만큼 가치가 있었던 자전거가 이제는 팔아도 되는 물건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현명한 소비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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