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멈춘 나라 (2) 정부 주도 성장의 한계

혁신은 없고, 성과 보고회만 남는다 : '소버린 AI'의 민낯

by Stella Note


[지난 이야기] 기술이 멈춘 나라 (1) 그 시작은 ‘돈’이었다.

(https://brunch.co.kr/@byeoul-bori/29)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단지 ‘선호’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돈이 정직하게 흐르지 못한 구조’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직한 돈의 흐름이란,

돈이 될 기술에 투자되고 — 그 기술이 성장하며 — 더 큰돈을 끌어들인 후 — 다시 새로운 기술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를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구조가 일찍부터 왜곡되었다.

정부 주도 산업화 시기, ‘돈이 될 기술’에 집중 투자되었지만, 그 결과물은 또 다른 기술로 환원되지 못하고, 특정 가문과 대기업에 고착되었다.

그리고, 그 대기업들은 기업가(Entrepreneur)가 아닌

사업가(Businessman) 중심의 생존 전략만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리스크를 감수하며 혁신에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는 획일적인 평가와 숫자 중심의 예산 집행에 고착된 정부 관행과 맞물리면서 실질적인 기술 성장 대신 외형에 치중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K-기술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포장되어 있는 정부주도 성장의 폐해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려 한다.




단언컨대, 정부가 주도하는 대부분의 사업은

혁신을 선별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성실한 정부 과제 납품자를 선별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잠시 언급했던 ‘국가대표 AI’ 선발전 사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사업의 정확한 사업공고 명칭은

[독자 AI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이다.

글로벌 파급력 있는 국내 독자 AI 모델을 확보하기 위한 역량 있는 국내 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취지하에
① GPU (’ 25~’ 27년 간 팀당 1,500장 이상),
② 데이터 (데이터 공동 구매 年 100억 원 + 데이터 구축·가공 팀당 年 28~40억 원),
③ 인재 (해외 우수 연구자 유치 시, 팀당 年 20억 원)
를 지원해 주겠다는 사업이다.

요약하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자원을 지원해 줄 테니 혁신을 만들어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GPU는 정말 비싼 자원이기 때문에 AI 사업을 하고자 하는 기업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는 건 분명하다.



이런 자원을 지원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시 부연 설명하자면,
정부는 매년 다양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R&D 예산(’ 25년 기준 24.8조 원 규모)을 확보하고, 이를 집행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서 실행할 순 없으니, 예산을 쪼개어(적게는 몇 억~ 많게는 몇 천억 단위) 지원하고자 하는 대략적인 분야와 방향을 설정하여 기획하고, 이에 따라 만들어지는 각각의 사업을 주도적으로 나서서 구현시켜 줄 최적의 사업자를 선정하여 예산을 이관한다.
이를 사업자 관점에서는 ‘공공사업을 수주한다’ 혹은 ‘정부 예산을 따낸다’고 표현한다. 이를 위해 사업자는 정부가 제시한 사업의 방향성과 지원 조건을 최대한 맞춰 제안서를 작성•발표하고, 경쟁자 대비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 우선사업협상자가 되고, 이때 정부 담당자들과 협상 조건을 추가로 조율하는 과정 끝에 정부와 계약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제시한 기준에 맞는 제안서를 작성하는 것이 사업자들이 정부 예산을 따내는 핵심 요소가 된다.



그럼,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의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가 제시한 방향과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목표를 살펴보자.

이는 사업 공고문을 살펴보면 아주 자세히 나와있다.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으므로, 사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열람 가능하다.


목표에서부터 드러나는 문제는 크게 3가지이다.


하나, ‘모방’을 전제하고 있다.

‘혁신’과 ‘창의’를 말하지만,

‘95% 이상의 글로벌 모델 성능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는 순간, “남을 따라잡기 위한 모방 경쟁”으로 방향이 고정될 수밖에 없다.


둘, 이미 시장에 포화되고 있는 한정적인 기술로 분야를 제한하고 있다.

LLM, LMM, LAM 등의 특정 모델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을 풀 수 있는 기술을 새롭게 만들어 냄으로써 ‘혁신’을 창출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미 정의된 문제와 문제 풀이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내는, 정답이 정해진 문제집과 다름없다.


셋, ‘측정 불가능한 선의’를 평가하고 있다.

‘AI 접근성 증진’, ‘AX 혁신’과 같은 정의될 수도, 측정될 수도 없는 개념에 대한 ‘기여 계획’을 평가에 반영한다.

좋은 계획이 실질적인 국민이나 산업 전반에 대한 영향을 보장할 순 없거니와, 이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도 모호하다.

결국 얼마나 그럴싸하게 잘 포장하느냐가 평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실질적으로 사업자 선정의 성패를 가르는 평가기준은 어떨까?

먼저,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는 기술력 및 개발경험 평가 기준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기술력 중심의 합리적 평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혁신을 저해하며 대기업만이 수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곳곳에 내포되어 있다.


한눈에 알 수 있는 건, 제시하고 있는 기준이 절대적으로 대기업에게 유리한 지표라는 것이다.

우선, 기술 성숙도의 지표로 제시한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한 기업은 사실상 삼성·네이버·카카오·KT·LG 등 대기업 일부만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특허, 논문, 오픈소스 모두 후행적 평가 지표로 “이미 완성된 기술”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더군다나 이런 지표들은 짧은 평가기간 내에서 수치로 치환되어 평가될 수밖에 없고, 질보다는 양으로 비교되기 쉽다.


혁신을 말하며, ‘상용화된 사례’와 ‘유사 사업 실적’을 요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실험 중인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한 ‘유사 사업 실적’을 요구하는 건 비현실적임에도

평가항목이 되어버리면 결국, 포장 잘된 성과 지표와 높은 정부과제 실적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수십, 수백, 수천억 규모의 자본이 필요한 “GPU 활용 경험”은 초기 스타트업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요소이다.


또한, 추진체계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관료 중심 사고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결정 구조다.

혁신은 결코 기업의 경영상태와 비례하지 않는다.

또 실패 경험이 많아 실질적 실적이 없거나, 기술만 있는 기업들은 사실상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안전한 사업자를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기준들은
'혁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정부 돈을 잘 쓸 것 같냐'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즉, '기술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고
미래를 개척할 기업'이 아닌,
'정부 과제를 실패 없이 무난히 완수할 기업'을 뽑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 기술의 완성도나 시장성을 보고 싶은 건지 ‘계획서 작성 능력’을 평가하고 싶은 건지 의문스럽다.


나아가, 개발 목표 및 파급효과에 대한 평가 기준을 보면, 기술에 대한 평가보다 과거 실적과 미래 기획서를 평가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과거 큰 조직에서 수많은 GPU를 사용해 봤다는 경험이 기술력이 되고, 구체적인 시장전략보다 선언적 기여계획에 점수가 부여된다.


위와 같은 평가기준의 숨겨진 문제는

단계적 로드맵과 각종 자원 활용 전략을 문서화 함으로써 실제 사업 진행시 속도를 한층 더 복잡하고, 더디게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관료들이 사업 관리를 수월하게 하고,

일정 내 사업 실패 시 사업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장치다.


사업 진행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정되어야 할 로드맵이 보고서로 고정됨에 따라,

변경 시 상위 기관 보고가 필요해지고,

이로 인해 추가적으로 구상될 수 있는 더 좋은 아이디어와 계획으로의 변경은 더욱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창의적인 실험은 저해되고,

리스크는 회피되며,

예측 가능한 것들만 실행하는 문화로 전락되기 쉽다.

창의적 기술은 실패를 수반하지만, 이러한 평가 기준 하에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시장 중심의 가치가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AI 접근성 증진”, “AI 생태계 기여”, “국산 반도체 활용” 등 공공 성과 중심의 정량 목표를 사업 성공으로 정의하고 있다.

‘기술의 사업화’보다 ‘기술 정책의 성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의 세부 항목들을 보다 보면
이 기술을 실제 사용할 ‘사용자’보다
커다란 현수막이 붙은
‘성과 보고회’가 먼저 연상된다.


그럼에도 이 과제에,

우리나라 유수 IT 기업들이 모두 달려들었다는 것이 나는 더 절망적이다.

정말로 이 판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만한 대기업들조차,

‘혁신’보다 ‘정부 과제’에 줄을 서고 있고,

이것은 한국 기술 생태계가 스스로 혁신을 포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체 자금력으로 GPU를 사고,

인재를 영입하고,

자신들만의 방향성을 설정하여,

세계 수준의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할 대기업들이

정부 지원금 몇 백억을 받기 위해,

정해진 평가표에 맞춰 문서를 만들고,

실제 R&D 보다 수많은 보고서와 행정절차를 이행해야하는 정부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


진짜 혁신은

무모해 보이지만 실행하는 소규모 팀,

빠르게 실험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스타트업,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창업가들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이 과제는 그런 주체들을 입구에서 걸러내거나, 대기업의 하도 업체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이미 정치와 행정에 능한 기존 플레이어들만 남긴다.

당연히 혁신은 없다.


혁신을 선도한다는 대기업조차 그 시스템을 바꾸기보다, 더욱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든다는 사실이 더욱 절망적이다.


정부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대기업은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며,
스타트업은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그렇게 그 누구도 진짜 기술을 만들지 못한 채
‘K-기술’이라는 구호만 널리 퍼진다.


난 이 과제가 형식적이라는 사실보다,

이 형식에 기꺼이 적응한 ‘혁신 주체들’의 침묵이 더 두렵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한국 기술 생태계는 진짜로 멈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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