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든 무조건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이 나의 실제적인 행복보다는 중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완고한 고집에 묶여서 질질 끌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의외로 많다.
현재를 잘 살아간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자로 잰듯한 이론을 적용시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살아가는 것일 게다.
유연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버티는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며 이런 삶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자신의 영역 안에서 조차 도태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좋게 표현하여 변함없는 노력으로 '초지일관'한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런 류의 삶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초지'라는 것을 잘 세우고 한눈팔지 않고 죽 곧은길로 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세는 훌륭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조차 "초지일관'의 길을 가다가 더 좋은 길이 나타나면 과감하게 길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가 종종 있긴 하다. 하물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니고 있는 그 '초지'라는 것이 애초에 옳은 것이 아니라면 '일관'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초지'가 우리의 인생에 깊이 파고 들어가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을 갉아먹고 있는데도 눈치조차도 못 채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우리는 우리 앞에 벽을 쌓아두고 완고하게 버티는 것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우리 인생의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줘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끈은 살짝 놓아버렸다 다시 잡아도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생각이 어디쯤에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눈물로 포장된 길이나 미래의 낯선 길, 그 어디쯤에서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을 것이다.
우리는 상처와 불안이 주는 후유증이나 트리우마에 민감해져 있어서 이런 일들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현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쓸데없는 고집으로 버티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 고집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바로 눈앞에 신세계로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자신의 완고함에 갇혀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우리의 생각과 느낌 사이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우울이라는 것이 찾아오게 된다. 현실과 실재의 괴리를 내 마음이, 내 양심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애써 감추고 스스로를 속이려 든다면 살아간다는 것이 고역이 되어 우울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는 표현을 한다. 정말로 그럴까?
확실히 안다는 것과 그냥 대충 아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대충 알고 있는 지식이나 이론에 고집이나 완고함이 섞여서 콘크리트처럼 굳어지면 그 누구도 그것을 깨어 부술 수 없다. 이럴 때 그 안다는 것이 우리 삶의 재앙을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어렴풋한 경험이나 지식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장해제하고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군인의 형편과 다를 게 전혀 없다.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완고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면 우리의 삶은 그만 큼 경직되고 어려워진다. 한 가정의 가장이 그러한 마인드의 소유자라면 온 가족 구성원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확률이 거의 백 프로가 될 것이고 크게 확대하여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온 국민을 불안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려면 좀 더 많은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목이 뻣뻣하여 아직 고개를 숙이는 것을 거부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이런 퍼스내러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집을 피운다면 한 나라가 망국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회적인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점점 더 뻣뻣해지는 목의 각도를 유지하려고 쓸데없이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뻣뻣한 목의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더 위험한 선택을 하는 순간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구원에서 영원히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뼈에 관절을 부여하자. 그리하여 그 생각이라는 것을 좀 더 유연한 것으로 만들어 보자. 우리에게는 마음의 양심을 지켜나가면서도 좀 더 유연한 삶의 방식을 터득해 나가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실 나도 그 방법을 확실히 모르고 있으면서 이렇게 떠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는 완고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내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내 속에서 자라 갈수록 나의 완고한 고집도 점점 자라나서 굳어져 버리면 나는 그 틀 안에 꼼짝할 수 없이 갇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줏대 없이 살아가는 것도 꼴불견이 되겠지만 나부터 어깨와 목에 좀 더 힘을 빼고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