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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Jan 21. 2023

프롤로그: 복기(復碁)하기




일기를 자주 쓴다.

입대하고 만든 습관이다. 제대하는 날에 읽으려고 시작했다. 하지만 제대하고 나서도 일기는 계속됐다. 나는 별걸 다 쓴다. 물론 중간에 싫증이 나서, 쓸모없는 허섭스레기를 모으는 것 같아서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삶은 구분되지 않았고, 구분 없는 삶은 공허했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쓰되 집착하지 않는다. 빼먹은 날은 빼먹은 대로, 생각난 날은 생각난 대로 쓰고 모은다. 그래서 사실 내가 가진 건 일기(日記)도 아니고 주기(週記)도 아니고 월기(月記)도 아닌 이상한 기록이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일기를 왜 쓰냐고, 왜 과거에 집착하냐고. 나는 답했다. 결국 삶에서 남는 건 기록이라고, 그리고 그날의 감정과 분위기를 다시 보는 게 재밌다고. 하지만 친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나는 모아둔 일기를 볼 때마다 복기한다. 

복기(復碁). 노련한 바둑 기사들이 끝난 바둑을 바라보는 일. 그들은 게임이 끝나면 억울함, 분함, 괴로움을 꾹 참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짚어보고 토론한다. 바둑의 조훈현이 말했다. 승리를 복기하는 건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패배를 복기하는 건 이기는 준비를 하는 거라고. 그리고 복기는 후회가 아니라고. 복기는 새로운 전략,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그렇다. 

나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과거의 메모를 본다. 시간을 잘라 역사의 단층을 보는 학자처럼. 지나온 발자국을 다시 밟는 것처럼. 특히 투자를 시작한 뒤부터 더 그렇다.    



       

투자 1년 차가 됐다.

1년 전만 해도 나에게 투자란 ‘나쁜’이란 형용사와 동의어였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며, 열등감과 모욕 그리고 부러움을 느끼며 투자시장에 뛰어들었다. 전문가들도 틀리는 이 바닥에서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미래를 볼 순 없어도 과거는 볼 수 있다. 그래서 투자 일기를 쓴다. 잃기도 했고, 벌기도 했던 기록들. 그것을 읽으며 복기한다. 끝난 바둑을 보듯이.          



 




투자 일기 안에 다양한 군상이 있다. 

파도처럼 오는 우울함을 견디는 사람이, 인간적인 욕망이 있는 사람,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욕망이 좌절된 사람이, 숫자를 보며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기뻐서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이 있다. 복기하며 보게 된 다양한 군상들. 이들은 모두 나다.      




복기를 하면 그들과 대화하는 것 같다.

나는 불을 발견한 인류가 고기를 익혀 먹어서 진화했다는 설도 믿지만, 인류가 모닥불을 피우고 그곳에 모여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진화했다는 설도 믿는다. 복기는 한밤중에 모닥불을 피우고 과거의 나와 대화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대화는 상처를 벌리는 것처럼 아프다. 나라는 존재의 시시함과 멍청함을 비웃거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비난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하지만 결국 교훈이 남는다. 그리고 그 교훈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인생은 문학이 아니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깨닫고 끝나버리는 문학 같았으면 좋았겠으나, 현실의 나는 무언가를 깨달아도 아주 조금 달라질 뿐이었고 계속 실수를 남기고, 계속 오점을 남겼다. 뭐, 원래 내 인생이 그랬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계속 기록하고 읽는 거다. 그리고 다시 회상하고 후회하고 다시 다짐하는 거다. 검은 신발을 계속 닦아서 흰 신발을 만들려는 미친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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