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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르 Apr 18. 2021

20210417 여행기

천안에서 쓴 일기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아저씨가 사는 곳에 아이를 하룻밤 빌려(?)주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만난 아이는 할아버지의 목을 오랫동안 꼬옥 껴안았다. 한달에 한 번 정도 아이는 할아버지 곁에, 우리는 1박 2일의 방학을 얻는다. 지난 번 방학은 대전에 있었고, 이번 방학은 논산으로부터 한 시간 정도 차로 걸리는 거리인 천안에 올라와 있다. 천안을 정한 이유는 특별한게 아니라 논산으로부터 1시간, 우리집으로부터 1시간 걸리는 딱 중간지점에 있어서였다. 어머님이 굳이 먹고 가라고 하신 우어회를 먹고,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가꾸시는 밭을 구경한 후 차로 1시간정도 걸리는 카페에 갔다. 양조장을 개조한 곳으로, 휑한 느낌의 벽과 작은 프로펠러가 촘촘히 돌아가는 실내는 마치 예전에 갔던 미국 포틀랜드의 한 카페를 생각나게 할 만큼의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고심하여 고른 스콘과 크루아상을 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다. 새콤하게 향긋한 아메리카노는 넓은 공간만큼이나 시원시원했고 적당히 따듯하게 데워진 크루아상은 고소한 느낌이었다. 카페의 입구에는 돌 들이 쌓여있었는데, 그 돌을은 알고보니 길냥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여진 돌들이었다. 카페에서 밖으로 나와보니 길냥이 다섯마리가 옹기종기 사료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근한 볕 아래에서 광합성을 하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니 엄마 고양이가 된 것 처럼 마음이 뿌듯해졌다.


카페를 뒤로하고 향한 곳은, 태학산 자연휴양림이었다. 언제서부턴가 둘의 여행에서는 산책이 빠지지 않게 되었다. 평소에는 저수지 주변을 2,3키로 정도 걷는데 오늘은 특별히 등산을 하기로 했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초록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시원한 숲공기에 머리까지 맑아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처음은 가볍게 올라갔지만, 점점 가파른 길이 나왔다. 정인의 오르막길이라는 노래까지 맴돌았다.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데 올라가도 올라가도 정상은 멀기만 했다. 아쉽지만 결국 정상을 250m남겨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앉은김에 사진이나 찍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엉덩이 툭툭 털고 내려갈 채비를 했다. 하늘을 보니 해는 뉘엿뉘엿 져가고, 볼을 스쳐가는 바람은 점점 차가워져 갔다. 우리는 내려오면서도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라며, 등산화도 없이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 대단하다며 서로를 토닥여 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니 누구할 것 없이 파리한 볼을 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손을 씻고 양치를 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호텔 근처로 술 한 잔 하러 나가기 위함이었다. 호프집까지 20분정도 걷는 발걸음은 산을 탔던 덕분인지 차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벗은 듯 훌훌 가벼웠다. 젊음이 가득한 천안의 화려한 번화가는 지나치는 것 만으로도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오면 연애할 때 생각도 나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한번씩 더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비록 평소에는 현실을 살아가느라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가지만, 이렇게 짧은 방학이 생기면 옛날 이야기도 하고, 술잔도 부딪치며 또 한 층의 정을 쌓아간다.


평범한 하루라는 하얀  도화지에 아련한 색상의 물감으로 톡톡 수묵화를 그린 듯하다. 그러니까 하루를 되돌아보아도, 쓴 글을 되 돌아 보아도 무언가 특별한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뭐, 살아가는 것이 그리 특별해야하는가, 그리 대단해야하는가. 오늘 어떤 글을 쓰지 고민하며 손이 가는대로 하루를 그저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 일기는 10년 후 소중한 기록이 되니까 여행지에서 글을 쓴다는 것 자체로 특별할 일이다. 이제는 그냥 맘편하게 푹 잘 일만 남았으니 오늘도 별일이 없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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