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청 Sep 07. 2020

보라색을 만드는 법

색을 대하는 감각

still life drawing (2020), 진청


빨간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운다. 그렇지만 반드시 보라색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과 보라색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보라색이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 있다.


2014년 봄학기, <종이와 섬유>라는 수업을 들었다. 전통 기법의 채색화를 그리기 위한 예비 과정 같은 수업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바탕이 되는 한지나 비단의 성질을 배우고 실습도 많이 했다. 유난히 하늘이 청명했던 어느 날, 인사동의 한 천연염색 공방으로 야외수업을 갔었다. 각자 적당한 크기로 자른 한지를 다양한 색으로 염색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통 기법의 천연염색을 할 때에 기본적으로 붉은색은 소목, 노란색은 치자, 푸른색은 쪽을 사용한다. 놀라운 사실은 보라색을 만들려면 그냥 소목과 쪽을 섞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푸른 쪽물에 먼저 담그고 붉은 소목으로 염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붉은색으로 먼저 염색한 다음 쪽물에 담그면 보라색이 아니라 거무죽죽한 갈색이 되었다. 그건 초록색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푸른색으로 먼저 염색한 후에 노란색을 입혀야 했다. 전통 천연 염색에서는 색을 섞는 데에 순서가 있다. 반드시 푸른색이 우선이다.


이후 천연염색에 빠져 여름 방학을 통째로 천연염색 공방에서 보냈는데, 순서를 아는 것이 중요한 핵심 중에 하나였다. 기본 삼원색을 섞어서 수많은 색을 만들어내는데 순서를 자칫 헷갈리면 의도한 색이 절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염색물의 농도와 순서를 조합해 보라색만 해도 수십 가지의 종류를 만들 수 있었다.


천연염색은 물을 어마어마하게 사용하는 작업이라, 배수가 잘되는 시설이 있어야만 작업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천연염색 작업을 그만둔지는 조금 됐지만, 그때 몇 달간 공방에 틀어박혀 천연염색만 했던 시간이 색 조합을 하고 색감각을 키우는 데에 큰 자산이 되었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어떤 음을 치면 눈을 감고도 어떤 음이었는지 맞추듯이, 어떤 색을 보면 그 색을 주어진 몇 개의 색으로 조색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이나, 색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삼원색과 하얀색, 검은색으로만 색을 조합해보는 걸 추천해본다. 다섯 가지 색으로 색을 조합하다 보면 색을 훨씬 예민하게 볼 수 있는 눈과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있는 손의 감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작가의 이전글 성수동 작업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