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기억된다는 건 멋진 일이야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 가장 고대하는 순간은 조색하는 때이다.
나는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색들을 사랑하지만, 강렬한 원색보다는 흰색이나 회색을 탄 부드럽고 탁한 색을 더 선호한다.
강렬한 빨강보다는 연한 산호색을, 쨍한 초록색보다는 올리브를 닮은 연두색을, 정직한 파란색보다는 연보랏빛이 감도는 톤 다운된 하늘색을 좋아한다. 강한 원색이 주는 힘을 의도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으나, 내가 더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색군은 뮤트한 색들이다.
예전 그림들과 비교하면 요새는 그래도 그림에 채도가 좀 올라온 편이긴 하지만, 워낙 은근한 색감을 선호하기 때문에 채도 낮춘 색을 많이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분채를 사용해서 그릴 때는 분채의 발색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호분(조개껍질을 빻아만 든 안료)을 사용해서 그린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그릴 때는 흰색, 회색, 베이지색 물감을 많이 사용한다. 주로 조소냐에서 나오는 Warm white, Opal색의 물감, 그리고 알파에서 나오는 회색 물감을 사용한다. 이 색들은 대용량으로 사두어도 늘 금세 동나곤 한다.
흰색과 회색만 섞어도, 얼마만큼의 양을 어떻게 어떤 물감과 섞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조합이 가능해진다. 제한된 물감들을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으면서 무한한 나만의 컬러 팔레트를 만들어나가는 건 나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 이상의, 마치 테라피 같은 행위다.
그렇게 만들어낸 색으로, 면과 선을 칠해나간다. 내 그림의 화면은 대부분 톤다운된 색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원색이나 검은색 등 강렬한 색을 부분적으로만 사용해 그림이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이 주는 메세지와 더불어 작가의 팔레트가 함께 기억되는 작가들이 있다. 마티스 하면 눈 부실 정도로 과감한 보색 대비, 김환기 화백 하면 환기블루, 쿠사마 야요이 하면 짙은 자주색이나 빨간색이 떠오르듯이, 색은 굳이 말을 빌리지 않아도 작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여전히 흰색과 회색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색의 물감이지만, 예전에는 쓰지 않을 과감한 색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쩌면 내 성격이 몇 년 사이에 좀 더 모험적으로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내 그림이 나의 내면의 변화를 눈치챈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아직 나는 다양하고 끝없는 색채의 세계에서 나의 색을 찾아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색으로 기억되는 작가 중에 한 명으로 남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 @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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