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나온 국문학도

글 쓰는데 그림도 그릴래요

by 진청
Pages from my sketchbook (2020), 진청


화가들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인터뷰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식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스물셋까지는 그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 혹시나 적성에 맞을까 해서 부모님께서 잠깐 보내주신 미술학원도 소묘가 싫다며 한 달만에 그만둔 나였다.


일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미대 나왔으리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할 때까지 소설가를 꿈꾼 소위 말하는 '문학소녀'였다. 이중전공으로 미술을 전공했고, 어쩌다 보니 이중전공을 본전공보다 더 많은 학점을 이수한 채 졸업하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나의 시작점은 미술이 아닌 문학이다.


미술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별로 낭만적이진 않았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이중전공을 장려하고 있어 많은 학생들이 본전공 외에 이중전공을 가지고 있었다. 미대는 앞서 다른 두 전공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 붙은 나의 세 번째 선택이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려본 경험이 없는 내가 붙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안 맞으면 바로 그만둬야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들은 미대에서의 첫 학기. 예상했던 대로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입학 전부터 예고에서, 혹은 미술학원을 다니며 몇 년간 실력을 연마해온 학생들 사이에서 크로키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는 다른 시작선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밤잠 설치며 한 과제가 형편없는 걸 보며 자괴감을 느낀 적이 셀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국문과 수업과는 비교도 안되게 모든 수업이 소규모 정원으로 학생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작품에는 만든 이의 이야기가 녹아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업시간은 나와 학우들의 삶 이야기로 채워졌다. 그 과정 중에서 나도 모르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고, 내 이야기를 글이 아닌 그림으로 풀어낸다는 것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희열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며 느낀 건, 문학과 미술은 매체만 다를 뿐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추가학기를 두 학기나 더 다니고 졸업전시까지 마무리한 후 나는 공식적으로 국문학과와 미대 학위를 함께 받고 졸업했다.


물론 졸업 후 지금까지 길을 돌아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내가 지금 그림 그리는 삶을 살리라고는 10년, 아니 5년 전만 해도 생각하지도 못했을 일이다. 10대의 내가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20대는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흘러왔다. 만약 내가 이중전공 1 지망이나 2 지망에 덜컥 붙어버렸다면 나는 내 천직을 절대 알지 못한 채로 평생 살았을 테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니까 삶이 때때로 막는 선택지에 대해 함부로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막힌 선택지가 때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멋진 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는 걸!




인스타그램: @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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