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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Oct 12. 2020

스스로 아카이빙하기

삶이 곧 작품이니까

Archive (2020), 진청


미대를 다닐 때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야외수업을 한 적이 있다. 교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미술관의 아카이빙을 담당하는 아카이브스트로 일하고 계셔서, 진로 탐방 겸 전시를 보러 반 전체가 함께 미술관에 갔다.


아카이브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해당 아카이브스트는 담당자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을 둘러보게 해 주시면서 미술관의 자료들이 어떻게 보관되고 관리되는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셨다. 벌써 오래전 일이라 사실 정확히 어떤 얘길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차곡차곡 쌓여있는 자료들과 서고의 이미지만큼은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돌아보니 인생 내내 스스로의 아카이브스트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에서 아카이비스트가 아카이빙을 하듯이 나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에 대해 내 방식대로 아카이빙을 해온 것 같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뭐든지 모으고 기록하는 걸 좋아했다. 일기쓰는걸 좋아해서 초등학교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모두 일기로 알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여덟 살 때부터 이사 가지 않은 것까지 겹쳐져 나는 내 인생 대부분의 기록들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만약 나란 사람이 지금 갑자기 사라져도 내 기록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으고 기록하는 나의 습관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완성된 작품만 보관하지 않고,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의 과정들도 모두 보관한다. 작가노트, 레퍼런스, 스케치, 사용한 물감의 팔레트까지 거의 모든 걸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다.


때로는 작품과는 별개로 이렇게 모아둔 작업과정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가 생기기도 한다.


웃기지만 가끔 혹시나 내가 훗날 알려진 작가가 되었는데, 사망 후 누가 회고록을 쓰고 싶어 한다면 자료가 과도하게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어쨌든 작가에게는 작가본인이 하든, 타인이 해주든 아카이빙은 정말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우리가 접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삶의 이야기들은 다 작가 자신 혹은 작가의 삶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보관하고 정리했기 때문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이 곧 작품이고, 작품이 곧 작가의 삶이다.

그렇기에 작품 이면의 삶에 대한 지식은 작품을 훨씬 더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지금 누군가 꺼내보고 싶은 서고가 될 수 있도록 그림과 함께 내 삶 속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중이다.



인스타그램: @byjeanc

https://www.instagram.com/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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