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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Oct 13. 2020

편집장님의 식탁

된장찌개와 나물 위로 오가는 책 이야기

pages from my sketchbook (2020),  진청

오늘은 일상적이지 않은 하루였다.


정작 회사를 다닐 때에는 십오 분도 채 이야기 나눠보지 않은 편집장님께서 내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집으로 초대해주신 것이다. 퇴사 후 인스타그램으로 일상을 확인하는 정도였는데, 얼마 전 내가 올렸던 게시글에 댓글을 남겨주시면서 갑자기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사적으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회사 다닐 때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던 데다, 퇴사한 지 무려 일 년 만에 뵙는 것이었다.


워낙 멋진 책들을 많이 만들어온 편집장님이라 회사 다닐 때부터 멀리서 동경해오곤 했는데, 먼저 이렇게 연락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해를 완전히 가리지는 않을 정도로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편집장님 댁을 찾았다. 반갑게 나를 맞아준 건 편집장님과 편집장님의 귀여운 딸,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고양이였다. 창문이 커서 볕이 잘 들어오는 집이었고, 책을 다뤄온 분이시라 역시나 집 안 곳곳이 책으로 가득했다. 따뜻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편집장님은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계셨다.

된장찌개에 나물에 생선조림까지 한 상차림을 대접해주셨다. 밥 먹으면서 책 이야기를 하는데 두 시간이 마치 이십 분처럼 순식간에 가버렸다.


공통분모가 많기 때문인 걸까. 일단 편집장님과 나는 둘 다 책을 좋아하고, 그림책을 좋아하고, 동물을 좋아한다.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건 거의 처음인데도, 그리고 거의 일 년 만에 만나는 건데도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았고, 대화가 끊기질 않았다.


밥을 먹고 미리 선물로 준비해둔 그림 굿즈 꾸러미를 건네드렸는데, 편집장님의 환한 리액션에 내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림들을 거실에 모두 펼쳐놓고 편집장님과 따님이 어떤 그림이 좋고 어떤 포스터를 가지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힘이 마구마구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오늘은 편집장님이 만들어주신 된장찌개에 밥 두 그릇을 비우고, 책 이야기를 실컷 하고, 열다섯 살 고양이 뱃살도 만져보고, 아홉 살 아이한테 그림 칭찬도 들은, 좋은 기운을 가득 받은 가을날이었다.


이뤄질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함께 콜라보로 동물 책을 함께 내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런 날을 꼭, 꼭, 꼭 만나볼 수 있길.


인스타그램: @byjeanc

https://www.instagram.com/byje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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