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았던 눈꺼풀을 열고 닫힌 문을 열었다. 내가 머문 온기가 열린 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듯 흩어진다. 시린 발끝이 내 감각을 깨우고, 흐린 눈 안으로 무심히 먼 산을 들인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간, 해와 달이 하나 되는 시간, 열린 연무는 춤을 추고 숨겨진 도시는 빨갛게 달아오른 여명 사이로 고개를 든다. 베란다 문을 열자 밤사이 촉촉해진 공기가 문 안으로 앞 다투어 밀고 들어온다. 난 추위에 놀란 몸을 추스르고, 밤새 비가 토닥여 놓은 온갖 미생물의 세상. 비릿하고 습한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난 그 흙냄새를 사랑한다. 빗방울이 토닥여 이제 막 폴폴 날리기 시작한 땅속 생명의 안부와도 같은 냄새를, 그리고 대지의 젖줄을 힘껏 빨아들여 흠뻑 젖은 흙의 비릿한 냄새까지도. 난 언제부턴가 그 갈색의 고운 흙내와 닮은 커피 향을 좋아했다. 내가 갖지 못한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는. 그 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향내를 닮고 싶었다.
커피머신의 윙 하는 굉음이 새벽녘 고요를 헤치고 깬 듯 깨어있지 않은 내 의식에 찬물을 끼얹는다. 나무 손잡이가 달린 커피잔을 꺼내고 차가운 우유를 부었다. 스팀으로 차가운 우유를 데우고, 흙빛과도 같은 갈색의 진한 커피를 내렸다. 커피는 주위의 냄새를 확고한 자기만의 향으로 바꿔치기하느라 바빠 보였다. 나는 커피의 향을 가두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닫고, 창가 커다란 탁자에 앉았다.
커피는 내가 나의 아침을 빨리 열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의 케케묵은 게으름을 몰아내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나를 분리시키고, 오분 일찍 십분 일찍 점점 더 빨리 커피 향을 맡고 싶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오로지 커피와 함께할 때 차분히 세상과 내가 만나는 시간. 덕분에 난 새벽녘 꼬물꼬물 깨어나는 세상의 느린 움직임을 관객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커피는 커다란 베란다 창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분리된 느낌마저 갖게 해 주었다. 깨어있되 손을 뻗지 않음으로 방해하지 않고. 관심을 갖되끼어들지 않음으로 오만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거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난 혼자서 깨어 있지 못했었나 보다. 내가 인내심을 갖고 계속 나만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친절한 친구. 엎질러지면 그만인 갈색 액체가 가진 힘은 어쩌면 마녀의 주문에 들어가는 여러 종류의 액체와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난 그 갈색 액체가 가진 강력한 마술에 걸려 내 앞에서 당당히 자기의 자리를 요구하는 갈색 액체를 그저 자나 깨나 사랑하는 건 아닐까.
내 엷은 미소가 아무래도 좋다고, 커피가 열어준 나만의 아침도 좋고. 커피를 마시며 이제 막 피어나는 내 세상과 마주하는 나도 좋고. 맡으면 코끝이 봉긋하게 올라올 것만 같은 커피 향도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그냥 커피가 좋다고 말한다.
오래도록 내 삶의 쉼표에 향긋한 커피가 언제나 나와 함께하길 그러다 보면 나도 내 세계의 확고한 향내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