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이었다. 해가 진 가을 날씨는 스산함까지 데리고 왔지만 달달한 냄새를 풍기며 동그란 모양을 버티는, 케이크 위에 켜진 열두 개의 촛불은 우리 가족의 축하 노래에 맞춰 너울너울 춤까지 췄다. 노래가 멈추자 우리 부부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가정의 앞날을 행복을 건강을 사랑을 기도 했다. 십이 년을 함께한 세월보다 앞으로 함께할 세월이 훨씬 더더 많아지길 더 사랑하길......
기념일을 맞아 근사한 외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들의 축구 훈련이 저녁 8시에 끝나는 관계로, 코로나가 길어진 관계로, 요즘 이런저런 행사가 많았던 관계로 고민 고민 끝에 우린 아들이 좋아하는 피자를 시켰다. 피자랑, 파스타랑 맛있게 먹고 우리 부부는 정리를 하고 한숨을 돌리는 사이 아들은 아직 시작도 안 한 학교 숙제를 꺼냈다. 수학 익힘을 풀어가는 숙제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거실에서 지내는 아들은 웬일인지 제 방에서 하겠다며 책을 챙겨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더듬이가 쫑긋하고 팽팽하게 곤두섰다. 아들은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호르몬 냄새처럼 진한 쿰쿰한 냄새를 풍겼다. 당장 필요한 물건을 찾아들었다. 아들이 소파에 벗어던져 놓은 점퍼였다. 자기 전에 집안을 정리하는 엄마가 되어 아들의 방문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이 잠겨있다. 레이더가 최대한 강한 신호를 찾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똑똑! 아들이 문을 열었다.
“아들. 문을 왜 잠갔어?”
“왜. 나는 내방 문도 잠그면 안 돼?”
“아니 처음 있는 일이라 무슨 일인가 했지.”
아들의 점퍼를 앞으로 내세우며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장롱 옷걸이에 옷을 걸며 고개를 슬쩍슬쩍 돌려 아들의 등 넘어를 보았지만 팽팽해진 레이더도 더는 이상 신호를 발견하지 못했고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와야 했다.
‘음.... 뭔가 있는데.’
아들이 숙제를 다했다며 가방을 정리했다.
“율아. 채점할게 밀렸어. 엄마 수. 익 책 좀 줘.”
학교에선 아이들이 푼 수. 익책을 항상 부모님께 채점받아 오라고 했다. 그러나 따로 검사한다는 말이 없자 나도 슬슬 귀찮아져서 채점 안 한 부분이 상당히 밀려있었다.
나는 빨간 볼펜을 들고 채점을 시작했다. 틀린 부분은 아들을 불러서 하나씩 다시 풀었다. 아들의 책 여백에는 곱셈과 나눗셈을 계산한 흔적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그려져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두 문제씩 틀리던 답이 뒤로 갈수록 완벽하게 다 맞아가는 걸 보며 ‘오~ 문제를 꾸준히 풀었다고 이쯤 되니 이해를 완벽하게 했나 보네’ 하고 흐뭇한 생각이 들 무렵 아까의 지저분한 흔적은 온대 간데없고 곱셈에 곱셈을 해서 더해야 하는 문제를 너무도 깔끔하게 암산으로 계산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문제를 중심으로 위, 아래 문제들을 훑었다. 혹시나 괜한 아들을 잡을까 싶어 나도 암산으로 문제를 풀어 보았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 쿰쿰한 냄새의 발원지가 명확하게 확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율아, 이리 와서 앉아봐”
최대한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불렀다.
아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다소곳이 앉았다.
‘오호 요 녀석 봐라’
아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잘못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율아, 이거 암산으로 풀었네? 이렇게 어려운 문제도 암산으로 풀 수 있는 거야? 그럼 다시 한번 풀어볼래?”
아들은 문제 앞에서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자 연필을 들고 책에 식을 써 내려갔다.
“아니 아니, 율이 이거 암산으로 풀었잖아. 그렇게 풀어보라고”
아들은 더 이상 어떤 반응도 없었다.
“율아, 엄마가 솔직히 얘기하면 한 번은 이해해 줄 수 있어. 이거 어떻게 풀었어?”
“해답지”
“율아. 엄마 이거 채점 그만할래. 율이가 푼 것도 아닌데 채점하는 게 의미가 없다. 그렇지? 근데 율아 학교 숙제를 해답을 보고 풀어도 될까?”
“아니”
"어떤 이유로든 너 자신을 속이고 부모를 속이고 선생님을 속이는 건 나쁜 행동이야. 알겠니?"
"네"
“다음부터는 아는 문제라도 모든 식을 수. 익책에 적도록해. 알았지?”
“네”
“정리하던 거 마저 하고, 이 닦고 와. 많이 늦었다. 자자.”
아들은 평소 똥도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싸는데 거짓말이 들켜 창피했는지 양치질하는데도 화장실 문을 닫았다.
소파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있던 신랑과 눈이 마주쳤다. 우린 둘 다 배시시 웃었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고, 한편으론 너무 귀여웠다. 신랑이 조용히 말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많이 컸네. 지은아 그만 이해하기로 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우리 클 때 생각해봐 충분히 있을 만한 일들이야. 안 그래? 흐흐”
“응~ 그래야지. 근데 율이 정말 많이 컸다. 그렇지? 난 한편으론 너무 귀여워. 때가 될 때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하고 지나가네. 흐흐흐. 그다음은 또 뭐가 올지 궁금하다. 흐흐.”
해답을 베끼고, 옆 짝꿍 시험지를 슬쩍 보고, 성적표의 수우미양가에 볼펜 뚜껑으로 어설픈 조작을 하다 부모님께 싹싹 빌며 회초리로 맞아도 보고, 성적이 떨어져 혼날까 봐 성적표에 엄마 몰래 확인 도장도 찍어가고. 그 옛날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이지 딱 그때뿐이었다. 자연스레 잘못을 알게 되고 거짓말로 인한 해소되지 않는 불편하고도 불안한 감정도 느끼며 그렇게 성장했다.
아들과 나란히 누웠다.
“엄마, 정말 미안해 결혼기념일인데 내가 엄마 기분을 망쳐놨어. 내가 정직하지 못했어.”
“그래. 율아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돼. 알았지?”
“응. 엄마.”
아들은 어느새 정직하지 못했던 마음을 넘어 내 기분까지 살필 만큼 커져있었다.
부모는 아이를 처음부터 잘못하지 않게 키우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 좌충우돌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며 자란다. 실수하지 않고, 잘못하지 않고 자라는 아이는 없다. 사회를 삶을 실수를 통해 배운다. 그때 필요하다면 부모가 나서서 바로 잡아주면 된다.
아들이 골골골 코를 곤다. 아들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채로 잠이 들었으니 꿈속에서 훨훨 날아 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